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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취재-4]평양의 추석분위기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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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9-09 23:32 조회8,43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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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을 방문중인 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은 평양의 추석모습을 취재했다. 금년 98일은 추석이다. 고향으로 떠난 시민들도 적지 않았지만  평양시에서 명절휴식을 즐기면서 조상을 추모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전쟁시기 남녘 정치인들 48명이 집단으로 이북으로 온 이야기를 포함하여 애국열사릉의 추석 모습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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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취재-4]평양의 추석분위기에 젖는다
 
 
[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금년 98일은 추석이다. 고향으로 떠난 시민들도 적지 않았지만  평양시에서 명절휴식을 즐기면서 조상을 추모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기자는 금년 추석에는 일행과 함께 남녘 정치인들 48명이 전쟁의 혼란시기에 북녘으로 넘어 인사들을 비롯하여 전후시기에 월북한 정치인들 65명이 안장되어 있는 평양외곽지역의 룡성구역의 ‘재북인사들의 묘’와 9명이 안장되어 있는 애국열사릉을 찾아 현장분위기를 취재했다.
 
이날 월북정치인들의 현주소를 알기위해 이들이 이북에 와서 조직하여 활동했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원들을 위해 혈육처럼 지원하며 함께 지냈던 현영애 선생을 만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전쟁시기 초기에 남녘정치인들 48(김규식, 조소앙, 엄항서, 최동오, 유동열, 윤기석, 조완구 ) 남녘의 미군지배 구조상황에서는 도저히 정상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비밀리에 집단월북을 제기하였고, 이에 대해 북녘 최고 지도부에서 토론한 결과 이들을 받아 들이기로 하여 북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요구에 의해  월북시키는 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 918 월북에 성공한 이들은 이북에 도착한 일주일만인 925 추석을 맞았다. 전쟁시기였기 때문에 이들이 월북하자 김일성주석의 지침에 의해 이들은 자강도(당시에는 평북) 만포로 후송되었다. 전쟁시기이지만 이들이 후송되어 있던 것은 당시에 조선의 최고사령부가 위치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김일성주석의 배려가 대단했다. 연로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구둘방을 온돌로 설치해 주었고, 이들 때문에 만포에 중앙적십자병원 시설을 확장해 전임의사, 전임요리사 등을 통해 철저히 건강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조치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뜨거운 배려에 월북정치인들도 엄혹한 전쟁시기에도 자진하여 고전연구를 하며 고전번역사업을 포함하여 각종 지원사업에 매진했다. 이들은 김일성주석의 배려에 의해 전쟁이 끝난이후에도 인민경제대학 특설학부에서 단계별로 공부하였고, 여러차례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주석을 접견할 있었다.
 
월북정치인들은 이러한 김일성주석의 세심한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1956 72 스스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를 만들어 정력적으로 활동하여 왔다. 바로 이러한 남녘 정치인들 65명이 묻혀 있는 묘지가 ‘재북인사들의 묘’(65 안장)이며, 그리고 9명이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이들중에는 남녘 군의 2 대대의 지휘관들이었던 강태무와 표무원 대대장들도 포함되어 있다.(재북인사들의 묘에 안장된 65명의 명단과 이들에 대해서는 별도보도할 계획)
 
6.15시대에는 이들의 남녘 친척들 2백여명이 이곳 ‘재북인사들의 묘’) 다녀갔다고 묘지 관리인 홍의수 선생(62) 그의 부인 박성희 선생(57) 설명하면서 “이곳에 안장된 65명의 재북인사들 가운데 아직도 김려식 선생(1890~1950.10.23 당시 신진당 중앙위원) 신용훈 선생(1904~1952.6.26 남한의 2대국회의원, 경상남도 의령군 군수) 사진들이 없어 묘비의 사진리가 공란으로 되어 있어 안타깝고, 그리고 김려식, 정구홍(남한 초대 농림부 차관), 리순택(리승만 정부 초대기획처장), 김한규(서울조흥은행장), 고명우(서울세브런스 병원 원장, 신용훈, 박성우(2대국회의원, 경북 상주군 농회 기수),  허영호(초대 국회의원, 서울 동국대학 학장), 리춘호(서울대학교 총장) 9명은 이들의 생연월일이 없다”고 밝히면서 2명의 사진들과 함께 9명의 생년월일을 구할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하기도 했다.
 
현영애 선생은 남녘 정치계 인물들의 월북자들 가운데 9명은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고, 나머지 65명은 '재북인사들의 묘'에 묻혔다. 65명은 처음에는 사망연한, 장소, 날자들이 틀려 분산되어 모시다가 2003년 6월에 현재의 자리에 모시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홍명희 선생 가족들 만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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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홍명희 선생 둘째 아들 손자들과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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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재북인사들의 묘'를 관리하는 동포들
 
 
남북에서 널리 알려진 홍명희 선생의 묘지는 애국열사릉에 있지만 가족들(2손자들과 1명의 손녀) ‘재북인사들의 묘’를 취재하고 자리에서 만나 짧은 대담시간을 가졌다.
 
알고 보니 홍명희 선생의 둘째딸이 정인보 선생(서울국학대학 학장, 남한정부 초대감찰위원장) 자제분과 결혼하였기에 가정은 사돈간이다. 그래서 홍명희 선생의 손자들과 손녀가 애국열사릉의 할아버지 묘소에 인사드리고 이곳 사돈댁 할아버지 정인보 선생의 묘지를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자는 홍명희 선생의 23 둘째 아들인 홍기무 선생의 아들 홍석오(67. 인민군 상좌-남쪽의 대령 전역),  작은 아들 홍석주(65-김책공대 졸업, 전기기계 분야 종사), 막내 딸인 홍석매(58, 인민군 제대, 삼흥사범대학 졸업하고 교원 역임) 3자매를 만나 잠시 대담을 나눴다.
 
홍명희 선생 손자 홍석오 선생은 어릴때부터 할아버지 홍명희 선생과 김일성주석이 배를 타고 접견한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일화들을 들으며 성장했다고 전제하고, “할아버지와 약속한대로 김일성종합대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된 상황에서 자원개별 입대하여 종신 군대생활을 하며 통일을 이바지하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종신 인민군 생활하다가 작년에 제대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핵물리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1968 프에블로 사건이 터졌던 시기에 19 나이에 “나라가 있고서야 우리가 있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며 조국을 보위하는 문제가 선차라고 결심한 나머지 인민군에 자원입대했다고 밝힌다.
 
막내 손녀인 홍석매 선생은 할아버지 홍명희 선생에게는 어릴때 언제 , , 체에 대해 배우면서 “애국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고 회고하면서 영도자는 태양이며 인민은 위성들이기 때문에 김일성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언제나 주체사회주의의 구심이며 중심이고, 조국통일의 구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13살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되돌아 보면서 추석이면 언제나 애국열사릉에 와서 인사를 드린다고 말한다.
 
‘재북인사들의 묘’가 있는 곳은 나라의 간부들과 이곳 관리인들이 생일이나 죽은날을 기념하여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이날 애국열사릉에는 조상들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중에는 아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얼마전까지 뉴욕유엔대표부 상임대표를 하던 신선호 수석대사가 이곳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그의 부친의 묘에 와서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며 그의 부인과 함께 이곳을 찾았고, ‘우리민족끼리’ 인터네트 언론 사장인 박정우 선생도 역시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가족들을 찾아 이곳을 다녀가는 모습을 있었다.
 
기자와 일행은 재미동포로 이곳에 안장된 홍동근 목사의 묘비 앞에 꽃을 올리고 인사를 드렸다.
 
 
 
추석날 모랑봉 을밀대 올라가 북녘동포들과 교류
 
 
애국열사릉과 ‘재북인사들 묘’를 취재하고 점식 식사를 하기전에 모란봉 을밀대 언덕에 올랐다. 올라는 가는 길목에 모란봉극장이 보인다. 이극장은 남녘의 김구선생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김일성주석의 통일전선 기치아래 하나로 뭉쳤던 역사적인 1948 4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다.
 
극장을 끼고 을밀대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내려오는 길에 여기 저기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앉아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펴고 나눠먹는 광경들이 많았다. 기자 일행은 안면이 전혀 없는 가족으로 다가가 우리 자신들을 소개하자 “여기 앉으라”고 하면 따뜻하게 맞아 주면서 자신들이 준비해 음식도 먹여주고 술도 부어주어 한때 즐거운 시간도 가졌다. 20여분 만에 기자는 이들과 완전히 한가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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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밀대에서 유골함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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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0여분만에 한가족이 되어 술한잔 마시자 안주를 먹여주는 처녀-이들은
해외동포들과 생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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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밀대에 만난 한 가족과 20분만에 한 식솔이 되어 이러저런 대화의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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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취재-3]연극 ‘승리의 기치따라’ 감상
 
*방북취재-2:  “북녘동포들은 모두가 통일운동가”
*방북취재-1: 중국 심양에서 묵고 평양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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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인사 사망경위 처음 밝혀져 김규식 조소앙 정인보 엄항섭 방응모 백관수씨등 망명 전북한 정무원 부부

이름: 관리자 2005-09-26 11:43:22  |  조회: 889

첨부 : 19911002-1.pdf 

6 25때 납북됐던 김규식 조소앙 정인보 엄항섭 방응모 백관수 등 주요인사들의 납북 및 사망경위가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 80년대 중반 망명해온 신경완씨(필명 69)의 구술기록에 의해 1일 공개됐다. 신씨에 따르면 국학자 정인보는 50년 8월 중순 서울을 출발한 뒤 일단 평양에 수용됐다가 아군의 평양입성 직전 적유령산맥을 넘다 대열에서 낙오,아사직전에 구출돼 뒤늦게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50년 11월 하순 58세로 병사했다.

독립지사로 입법원 의장을 지낸 김규식은 서울수복 직전인 50년 9월26일 밤 납북돼 평양을 거쳐 계속 북쪽으로 끌려가다 그해 12월10일 만포 부근 군병원에서 지병인 천식이 악화돼 69세로 사망했다.

김규식과 함께 납북된 독립지사 조소앙(당시 국회의원)은 56년 재북평화통일 추진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나름대로 민족주의적 독자노선을 펴며 김일성체제에 반대해 단식투쟁을 하다 58년 9월10일 평양 남산에 있는 병원에서 71세로 병사했다. 김구를 보좌했던 독립운동가 엄항섭은 조소앙과 함께 활동하면서 김일성체제에 가장 강력히 저항하던 64세이던 62년 7월30일 평양에서 홧병에 따른 고혈압으로 숨졌다.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는 50년 9월28일 개성북쪽 서흥에서 트럭에 실려가다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사망했다. 방응모는 서흥부근에 매장돼 지금도 묘지가 남아있으며,그 구체적 위치는 함께 납북된뒤 현재 평양에 생존해있는 인물이 알고 있다.

그러나 신씨의 증언과 달리 방응모와 함께 납북됐다 탈출한 계광순씨(당시 광업진흥 사장 작고)는 방응모가 평양까지 끌려가 자기와 함께 수감됐으나 병환으로 거동을 못해 이감되지 못한채 헤어졌으며 당시 상황으로 보아 그곳에서 옥사하지 않았나 추측된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밖에 주요인사들의 사망일시 장소 및 사인은 다음과 같다.

백관수(동아일보 사장 제헌의원)=61년 3월 초순 선천에서 72세로 병사 유동열(독립운동가 미군정청 초대통위부장)=50년 10월18일 73세로 희천서 노환사망 조완구(독립운동가)=54년 10월27일 평양서 74세로 병사 최린(민족대표 33인)=58년 12월말 선천에서 80세로 노환사망 원세훈(국회의원)=59년 12월25일 72세로 평양서 병사 최규동(서울대총장)=50년 10월18일 평양부근 용성 마림마을서 69세로 공습 폭사 윤기섭(국학대학장)=59년 2월말 78세로 평양서 병사 최동오(임정법무부장)=63년 9월16일 평양 남산병원서 노환사망 오하영=60년 8월 중순 남산병원서 병사.

신씨의 증언내용은 평화신문 편집위원 이태호씨에 의해 집필돼 오는 10월 중순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이라는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관련기사 3면>

http://www.kwafu.org/korean/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8&num=10519&page=4&keycode=&keyword=&c1=&c2=&sub_code=

대학원생님의 댓글

대학원생 작성일

이분들의 처지는 납북이 아니라 자진입국, 의거입국, 지원월북으로 표기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이승만 정권이 김구선생님을 비롯하여 여운형 선생님 등 민족주의자들을 살해하고
이들을 적적으로 대우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미군의 시녀정치인으로 앞세웠기
땜에 의식가진 남한 정치인들은 그 당시에 북측의 민족지향 사회, 진보지향 사회를 선택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자원입국 배경이기에 납치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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