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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박문재박사의 애국열정과 그의 삶(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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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8-25 03:03 조회7,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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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민족통신 특파원은 카나다 조선여자축구경기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박문재박사가 거주하는 미시간주의 조그만한 도시, 로체스터(Rocester)를 방문하여 그의 삶과 그의 국열정에 대해 취지하면서 여려가지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별대담을 통해 그의 (1)통일방안에 대한 의견, (2)국내외 애국세력의 단결단합에 대한 자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3)그의 애국열정에 대한 동기와 삶의 현주소를 알아보았다. 마지막 대담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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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끔 외식을 하며 휴식하는 박문재박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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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무실에 놓인 가족사진-왼쪽부터 부인,막내아들, 딸, 박문재박사, 큰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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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부부가 사는 살림집 뒷마당 넓은 잔디밭 끝에 호수가 잇닿아 있고, 박문재박사 가족이 즐기는 보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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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정문에 들어서서 보이는 박문재박사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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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문재 박사 소유의 메디칼센터 건물-이 안에는 내과, 외과 등 각종 의사 사무실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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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문재박사 심장내과 사무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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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무실에 놓인 가족사진들, 집과 콘도에는 조상들의 사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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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요즘 타고다니는 승용차 폭스바겐, 계속해서 폭스바겐만 이용해 온 박문재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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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문재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서 한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저택의 뒷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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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문재박사는 부모,조부모, 외가댁 조상들의 사진들을 걸어놓고 뿌리를 기억하는 모습

[특별대담]박문재박사의 애국열정과 그의 (3)


[로체스타=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박문재박사(81)가 거주하는 곳은 인구 13천명 가량되는 백인중심의 지역으로 미시간주(주 전체인구-990만명)의 조그만한 중산층 이상이 살고 있는 디트로이트 시의 북쪽에 위치한 오크랜드 카운티 안에 위치한 외곽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반세기 가깝게 살아온 박문재 박사의 삶의 현주소를 알아 보았다.

  

*박문재박사의 미국생활 53

 

 박문재박사는 1933 730일 서울태생으로 덕수국민학교를 나와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을 수 있었고, 1960년 예과, 본과를 마치고 1961년 미국 미네소타 대학으로 유학올 때에도 역시 전액 미국정부 장학금(Public Health Full Scholarship)을 받고 왔기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1965년까지 미네소타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학부학생들에게 강사로 4년동안 심장생리학을 가르쳤다. 그러던중1968년 미시간주 로체스터 오클랜드 대학의 부교수로 들어가 15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학생들로부터 최고의 훌륭한 교수(Best Professor)’로 평가받은 정도로 매사에 성과 열의를 다했다.  

 

놀라운 것은 오클랜드 대학에 3년전에 세워진 보건센터(Human Health Center)건물안에 박문재박사의 초상화가 창시자라는 명의로 걸려있다. 알고보니 박문재 박사는 교수생활을 하면서도 이 대학에Medical Technology(의학기술과), Physical Therapy(물리치료과), Occupational Health Therapy(직업건강치료과), Public Health(공공보건학과) 등을 설립한 공로가 있었다. 그는 또 이 대학교의 보건대학(School of Health Science) 학장으로 재적시절 의과대학 수립을 위해 기초작업을 하면서 의무관계 부총장으로 임명받고 일하기도 했다.

 

박문재 박사는 임상개업을 하려고 15년 근무하든 학교생활을 떠났지만 임상교수로는 지금까지 쭉 후진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오클랜드 대학당국은 박문재박사의 공로에 대해서는 대단한 것 같다. 2년전에 대학졸업식에서 하는 유일한 연설자(Commencement Speaker)로 선임될 정도로 신망이 높은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박문재박사는 비록 소수민족출신의 의사이며 의학자이지만 백인중심의 이 도시 교육계 인사들을 비롯하여 시민들은 그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박문재박사가 소유한 3층건물의 메디칼 센터에 오는 각종 환자들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높다는 것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서 만난 환자들은 그에게 생일카드를 주며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가족처럼 지나는가 하면 박문재박사 심장내과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정성드려 쓴 생일카드와 함게 아이패드를 비롯한 생일선물들과 생일케이크를 차려놓고 생일을 축하하는 장면도 관찰했다. 그는 자기 직원들과도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한 직원에게 다가가 이곳에서 얼마동안 일했냐고 묻자 그는 15년이 넘었다고 대답한다. 직원들의 자세들은 모두가 자기일처럼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 많았다.

 

*언제나 조상을 생각하며 뿌리를 잊지 않고 있는 박문재박사

 

그의 병원 사무실에 들어가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살아있는 가족사진들 뿐만 아니라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사진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을 찿는 환자들은 대부분 미국인들인데 3층 복도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노래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노래와 음악도 간간히 섞여 나오고 있었다. 그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때 그는 16대 의사 가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조상 대대로 의사들이 줄을 이어져 왔다. 외가쪽 할아버지의 사진도 보였고, 친가쪽 조상들의 사진들을 보면서 박문재박사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병원에서 걸어서 10분정도 가면 사설골프장에 인접한 고급콘도가 있다. 이 콘도는 가끔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콘도에 있는 그의 사무실과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도 살아있는 가족들과 함께 세상을 떠난 조상들의 사진들도 모시고 있었고, 부부가 주로 살림살이하며 살고 있는 주택에 가도 조상들의 사진들을 똑같이 모시고 있었다.

 

살림집에서 만난 그의 부인 정신자여사는 서울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박문재박사와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지만 그의 일상생활은 무척 바쁜것 같았다. 남편이 운영하는 병원의 재정관리를 비롯하여 병원, 콘도, 주택 등 부동산 관리 등을 하는데에도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지만 과외활동으로 동양화, 서양화를 그리는 활동에도 바쁜 모습이었다. 부인이 그린 그림들은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라 전문 화가들의 솜씨로 보였다.

 

박문재박사는 21녀를 두고 있지만 이들은 장성하여 전부 독립하여 나가서 살고 있다. 자녀들의 직업은 의사이고, 변호사이고, 컴퓨터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연중 중요한 날에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오손도손 보내기도 하지만 시카고, 시애틀 등 멀리 떨어져 살아서 자주 볼 수 없어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산다고 한다.

 

부부가 살림집으로 살고 있는 저택에 갔을 때 나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미국영화 ‘Sound of Music’에 나오는 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주택 뒷마당에 펼쳐진 넓은 잔디마당과 함께 호수에 인접한 물가로 다가가 물밑을 보면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속에서 이리저리 헤엄치고 다니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 물가에는 고급보트가 있다. 아마도  손님들이 오거나 가족들이 모이면 대하같은 호수를 가로지르며 물놀이를 할 때 이용하는 것 같다. 주택주변 환경은 먼지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공기와 자연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기자는 취재를 하면서도 박문재박사는 정말로 검소한 인물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고,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그의 생활모습은 너무나 검소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타고 다니는 승용차도 경제적인 자동차로 알려진 반달 모양의 폭스바겐이다. 그는 비까번쩍하는 자동차를 탈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폭스바겐을 이용해 왔다.

 

기자는 이런 환경과 부를 누리는 동포가 어떤계기로 이북돕기 지원사업과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에 궁금중이 있어 질문해 보았다.   

  

*박문재 박사가 통일운동에 관심갖게 된 계기

 

       대부분 부자들은 통일운동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특히 주류사회에서 성공한 동포들은 더더욱 통일운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박문재박사는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을까그것이 궁금했다.

 

박문재박사는 서울태생이지만 할아버지가 사시던 제주도를 고향으로 생각해 왔다. 그는 2011 9월에 남녘의 한 일간신문에 기고한 그의 수필 한편(평화의 섬 제주도에 해군기지란 웬말? –재고가 필요하다!- “내 말 들어 봅서, !”)을 떠 올린다.

 

그는 이미 중학교 시절에 4.3제주민중항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전쟁시기에 일어났던 일부 사건을 직접 경험하면서 가슴아픈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어머니가 자신을 포함하여 형제자매들 넷을 데리고 열차칸 꼭대기에 타고 서울서 부산까지 사흘간 고생하던 이야기, 이어서 할아버지가 한의사를 하며 살고 계시던 제주도로 가면서 또다시 배에서 사흘간 겪은 고생담을 비롯하여 제주시내 군수공장에서 수류탄 만드는 포장공으로 취직해 일하던 때, 제조된 수류탄을 포장하고 완성된 수류탄을 시험하기 위해 매일 몇개씩 뽑아서 시험투척하여 폭발시키는 일을 하다가 이것을 안 어머니가 살려고 피난 왔는데 그게 무슨 짓이냐고 펄펄뛰시는 바람에 집으로 끌려가던 이야기, 그 후에는 신문팔이도 하며 지내던 이야기, 그리고 우연히 장터에 갔다가 중학교시절에 배운 영어 덕분에 어린시절에 미군포로수용소에서 1년 반가량 통역관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돕던 일 등을 접하면서 박문재박사의 뇌리에 어떤 생각들이 누적되어 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수필 마지막 부분에 묘사된 내용은 그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전쟁  어린 소년으로 제주도에서 쓰라리고 마음 아픈 경험을  나는 이제 미국시민으로서미국사회에서 학자로서대학교수로서 그리고 내과의사로서 경력을 맞추어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서 있다그러나 이제도 눈을 감으면  옛날 제주 해변에서 햇빛이 쨍쨍한 오후에 바닷물에 두둥실  있는 슬픈  여인의  치마를   있다.그러면서 앞서 말한 47세의 제주 어부가  슬픈 장면을 목격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우리 제주사람들은 아니 우리 탐라 사람들은  바다건너 육지에는 자기 배만 부르면또는 자기 외국 상전의 명령만 만족시켜주면 한라산백록담을  팔아먹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소위정치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4·3 사건이  일어났던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그의 가정사를 통한 또 하나의 아픔이 있었다. 24녀중 장남이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제주도로 피난갈때 자매들 중에 누님 한분은 없었다. 이 누님이 전쟁시기에 남녘에서 유명한 성악교사로 활약했었던 김자경 선생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전쟁이 터진 이듬해인 1951년 스스로 결심한 나머지 이북으로 간것으로 알았다. 그렇지만 44년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길이 없었다. 그러던중 1995년 꿈에도 그리던 누님을 상봉할 수 있었다.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의 순간은2012 10월에 사라지고 말았다. 누님은80세를 살고 운명했기 때문이다.

 

그의 누님, 박경재는 어찌하여 월북하게 되었던가. 이에 대해 박문재 박사는 누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다. 전쟁시기에 누님을 아껴주던 은사와 함께 월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악가 자질을 소유한 누님이었기에 월북하여 인민군협주단에 단원으로 활약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김일성주석의 배려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이후에는 유명한 피바다 가극단의 전속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했고, 인민군협주단의 송방원 중장(왕별3)과 결혼한 것으로 듣게 되었다고 박문재박사는 설명해 준다

 

박문재박사는 누님을 만나기 위해 방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북을 돕는 운동, 특히 평양의 제3인민병원에 시설지원하는 사업을 포함하여 의학자토론회에 참가하여 의술과 이론을 나는 의학술교류사업, 그리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사업을 통해 북과 교류하는 사업에 참여해 왔다고 밝힌다.

 

그의 삶은 직업이 의사이지만 분단된 조국을 그냥 두고서는 후대를 위해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애국열정에 남은 생을 바치려고 혼신을 다해 노력하는 정열적인 애국동포 중 한 분이라는 사실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번 방문취재를 통해 기자는 많은 것을 배우며 느낄 수 있었다.()

  

*대담-2  기사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4954

 *대담-1 기사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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