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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8]코리아전쟁, 그 진실을 알아본다(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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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3-26 15:07 조회12,769회 댓글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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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거주 동포가 제공한 자료 "코리아 전쟁 진실을 알아본다'라는 7~8번째 연재글을 종합하여 소개한다림원섭 선생은 이 자료들은 6년전부터 오랜동안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며 코리아전쟁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며 모은 내용들이라고 밝힌다.[민족통신 편집실] 


[7]

독립을 방해하고 다시 식민지노예로 삼으려는 외세와 친일매국노 치하에서 노예 가 되느니 자유인 으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탄압하기 위해 박진경연대장, 최경록연대장, 송요찬연대장, 함병선연대장 등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지휘관을 임명했다. 

 친일세력들은 한국 민중들의 배척의 대상이 되어 불안전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미군정은 그들 친일세력 에게 진압을 맡겼다. 친일 세력들에게 진압을 맡기면 공을 세워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받아 불안전한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본을 대신해서 자신이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이 하던 방식대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국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괴뢰정부가 친일파가 아닌 지도자나 관료는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기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은 온 국민이 반대해서 그의 명령에 따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친일파들도 미군의 지시를 따르지 허깨비 지시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해방 후 김구 등의 민족 지도자를 수없이 죽인 사람은 허수아비 이승만이 아니고 미군이었습니다. 
  
이렇게 민족 지도자는 미 군정청이나 정부에서 기용하기는커녕 수없이 살해 했는데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기용 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해방직후 조선의 전 지역에서 조직된 각급 인민위원회들은 일본군대와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치를 실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복하여 패망한 후에 자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기를 원하여 조선에 있는 민족지도자에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을 담당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겼다. 따라서 미국이나 소련 두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면 미군은 이런 우리의 자치 기구를 지지하고 도움을 줘야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산시키고 친일세력으로 치안을 담당케 하였다. 미군정은 제주 4.3 이 발생 했을 때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위해 협상했던 김익렬 연대장 등 일본군 출신이 아닌 장성은 교체시켰습니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 면서 (5월6일). 전격적으로 제9연대장을 교체 하였다 그 동안 협상을 추진해 온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박진경을 발령한 것이다.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인물이다. 

미군은 제주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박진경을 진압군 지휘관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 학살했으며, 딘 장군은 이 학살을 보고받고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하고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이로서 제주도민 4만 명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도 부모형제를 잃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1948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자 국군은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에 돌입했으며 작전 중 산간마을을 소개하였다. 빨치산을 토벌하던 제3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7월 18일 빨치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2대대장의 인솔하에 출동한 국군은 신천리 인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변과 신천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사살, 척살의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제2대대 주둔지인 덕산국민학교와 제3연대 정보과 군인들이 본부를 차려놓은 농회창고에서 마을 사람들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살해했다. 희생자들은 토벌작전에 나갔던 국군에게 각 마을에서 연행되어 국군의 주둔지에서 고문을 당한 후 시천면 덕산국민학교 뒷산이나 농회창고 뒷산, 삼장면 가막골 등지에서 살해당하거나 혹은 희생자의 거주지에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3연대는 1950년 1월 말 서울로 이동할 때까지 인근 지역 주민 수백 명을 빨치산과 협력하거나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살해했다. 

 1949년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경북 대구에 주둔하던 육군 제6연대와 이 부대를 재편한 22  정보국 소속 호림부대ㆍ경산경찰서 등은 지역 내 빨치산과 남로당 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였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참고인은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하였다.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였다. 

 1949년 7월에서 1950년 1월 말 사이에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강변, 신천리 신천국민학교, 원리 덕산 국민학교 뒷산, 사리 농회창고 뒷산, 삼장면 평촌리 가막골 외 지리산 산간마을과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국군 제3연대 정보과, 제2대대 소속 군인들에게 집단살해 당했다. 

 제7사단 제3연대는 1949년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덕유산, 괘관산, 반선리 일대에서 공비토벌작 전을 수행하였다. 1949년 7월~1950년 1월 국군 3연대 소속 군인들이 경남 산청군 주민 129명을 살해한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 희생 사건’은 빨치산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토벌군이 비무장한 농민들을 고문·총살하거나 총검과 죽창을 이용해 살해하였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8]
 6.25는 도대체 무엇인가? 

코리아(북미)전쟁, 북침, 남침보다 더 더러운 반칙이 있었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에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녀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여자 41명 어린이 10명과 갓난아이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만행을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던 것으로 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비망록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산북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하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뒤에 신임 문경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친일 매국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들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민간단체에 조사를 의뢰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소행을 인민군에 뒤집어씌운 조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 1.2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산동면에, 국군 제12연대 1-3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지 구례중앙초등학교와 구례구역 등에 각각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집단 사살했다.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3월 28일부터 오대산 및 황병산 일대에서 끈질긴 공비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 기간에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 5개 지구에 대한 ≪토벌≫ 공세를 벌리고 이 지역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주민 약 4만 명을 학살하였다. 
미군정 치하인 지난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거제 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수백 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청면과 장승포읍 주민들도 1949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국군 제16연대 등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 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 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反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때리기'와 '말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다음에 계속)
[연재-4~6]코리아전쟁, 그 진실을 알아본다(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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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대학원생님의 댓글

대학원생 작성일

한국에서 배운 한국전쟁 역사는 거의 왜곡, 그 자체였습니다.
새로 정리한 전쟁원인들이 필요합니다.

목란꽃님의 댓글

목란꽃 작성일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자료를 보면서 한국전쟁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다시금 해보는 계기가 될것 같습니다.

꽹과리님의 댓글

꽹과리 작성일

미제와 그 주구들의 만행은 보는 사람들의 치를 떨게하고 끓는 복수심에 사무치게한다.
외세를 업고 설쳐대는 친미 친일 매국노들을 철저히 계산할때가 되었다.
놈들에게 파멸을 안겨주어야 한다!!!

다물흙님의 댓글

다물흙 작성일

대학원생님!
같이 정리할까요?

진달래님의 댓글

진달래 작성일

한국서 펴낸 역사들은 친일사대주의, 친미사대주의에 의거한 역사입니다.

역사의 정통은 민족자주사관에 의거하여야 합니다.

위에 정리한 전쟁사도 민족자주사관에 기초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근데 한국어용학자들이 펴낸 전쟁이야기는 그저 반공, 반북입니다.

쩍하면 남침만 반복합니다 해방전후사, 제국주의 침략사를 두루살펴야 되는데...

우리민족 주체적입장에서 역사를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측면에서 림원섭선생님이 소개한 글들은 아주 좋은 것 같아 새역사를 봅니다.

감사드리옵니다.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작성일

진짜 놀구들 있네...
역사를 가지고 장난들 치고 있네..
어째 나이가 먹으나 젊으나 다 여긴 똑같냐...쯧쯧쯧..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허허 나그네님~!!!! 그말 삼가하시요~!!!!

바람개비님의 댓글

바람개비 작성일

육이오의 아픔으로 눈물로 살아온 남한의 실향민들..
그대들은 이마음을 무엇으로 갚기를 원하는가..
참 이상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만 있네 그려..
육이오 그날, 그렇게도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대를 보며 남으로, 남으로 가족과도 생이별하며 김일성이 인민군대 때문에... 두눈뜨고 돌아가신 많은 실향민들을 위해 기도하라..
뭐시라...민족자주사관을 기초로 하였다?
공산주의를 위해 동족에게 총뿌리를 겨누고 살육을한 육이오 역사가 무엇이 어쨌다고?...
주님...오늘도 기도드립니다..아직도 꿈속에서 헤메고 있는 중생들을 구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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