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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미국은 왜 북미평화협정 거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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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9-23 08:16 조회5,8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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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원로학자인 선우학원 박사(96)는 민족통신에 보낸 특별기고문을 통하여 미국은 왜 북미평화협정을 거절하나?” 라고 질문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임기전에 역사에 빛나는 일을 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여받은데 대한 업적을 남겨야 한다고 충언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해야 다소나마 미국의 나쁜 이미지를  좋은 이미지로 바꾸어 세계인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의 글을 여기에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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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미국은 왜 북미평화협정 거절하나?

 

*:선우학원 박사(재미동포원로학자)

 

1950년 코리아전쟁이 시작하자 북조선 인민군이 남한의 3분의 2를 점령하고 서울 수도에서 부산으로 이동하고 이승만 정부는 미국에게 시급한 원조를 요청했다.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인솔하에 미군을 남한에 파견했고, 미군은 인청상륙후 38선을 넘어 북을 점령하고 중국 국경에 도달하게 됐다. 이때 중국은 지원병 수천명을 북조선에 파견하여 미군과 접전하게 되자 미군은 이남으로 퇴진케 됐다.

 

맥아더 장군은 이때 핵탄 26개를 사용할 것을 트루만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그러나 트루만은 그 제의를 거절하며 맥아더를 사령관에서 퇴임시키는 한편 매튜 리지웨이 대장을 사령관으로 대치하여 전쟁을 무마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판단은 조선과 그 뒤에 중국이 참여하는 조건에서 코리아전쟁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한 나머지 조선과의 전쟁을 중단하고 조선, 중국, 미국 3자가 판문점에 모여 허겁지겁 한 분위기 속에서 1953 7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날을 전승절로 기념해 왔다.

 

그리고 정전협정에서 코리아반도 내에 외국군도 철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국 의용군은 정전협정에 들어있는 내용대로 북조선에서 철수했으나 미군은 그 약속도 어기고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 60년 동안 남한 땅에 주둔하면서 북조선을 핵침략으로 공격하기 위한 이른바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왔다. 설상가상으로 코리아반도에 1천여개가 넘는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북조선은 미국의 무모한 핵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핵억제력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주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핵억제력 개발에는 리성기 박사와 국내파와 유학파 수명의 핵물리학자들이 공동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은 북조선의 핵무기개발을 유심히 탐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조선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담했다. 즉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1976년 핵무기를 장비한 비행기와 잠수함을 남한에 파견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미 카터행정부는 미군핵무기를 250개 수준으로 축소시켰다. 카터는 코리아반도 분단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북간의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그 책임감이 미국에게도 있다고 생각했던 미국의 양심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카터 후임으로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의 핵무기 감소정책은 중단하기에 이른다.

 

그때 걸프만(중동) 전쟁이 끝나고 미국연합사령관 콜린 파웰 대장은 미국의 원수는 카스트로와 김일성 뿐이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다. 미국은 당시 적들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미국경제는 군사경제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없이는 군사무기 생산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경제구조에서 군사무기 생산에 종사하는 군산복합체가 이득을 챙기기 위해 불필요한 전쟁들을 만들어 내야하는 모순에 직면하여 왔던 것이 미국경제구조의 문제점이었다.

 

1994년 봄, 북조선의 핵개발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을 미 당국자들은 감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국방성은 제2의 코리아전쟁을 준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더 많은 전쟁무기들을 남한땅에 배치했다. 헬리콮터와 탱크들도 증가시켰다. 그리고 주한미군사령관 러크 대장을 지원할 작전계획을 미국방성, 펜타곤에서 토론하게 되었다. 바로 그해 54일에 펜타곤에서 작전회의가 있었다. 거기서 예측한 것은 전쟁이 발생하면 3개월내로 미군 10만여명, 남한군인 50만여명이 희생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결과를 클린턴 미대통령에게 보고 했다고 한다. 클린턴 행정부는 북의 핵개발 시설로 알려진 연변을 폭발할 것인가 아닌가를 신중하게 토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실은 비밀이 아니고 공개된 사실로 나타났다.

 

그 당시 미국에 남한에 관한 미국위원회(American Committee on Korea)’가 코리아반도 평화정책에 대해 연구하며 대책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 조직은 37명의 미국 전문가들로 구성된 단체였다. 그 중에는 감리교 감독이 두명, 성공회 감독이 한명, 그외 몇명의 기독교 목사들, 부르스 커밍스를 포함한 미국인 교수들, 언론인들, 램지 클라크 전 법무장관, 그리고 재미동포 학자들 수명이 포함되었다.

 

이 단체가 남한 사정의 위험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평양에 파견하기로 작정하고 교섭한 결과 카터 전 대통령이 허락했다.

 

그래서 카터 전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과 상의했을때 클린턴 대통령은 카터 북조선 방문을 거절했다. 그러나 카터는 개인자격으로 간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클린턴 대통령이 반대할 수 없었다. 카터는 부인과 외무성 관리들,그리고 CNN 기자들과 카메라멘들을 동반했다.

 

카터 일행은 서울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났다. 자기의 평양방문을 설명하고 3.8선을 넘어가기로 했다. 이에 김 대통령도 환영했다. 카터 일행은 3.8선을 넘어서 북조선에 입국했다. 이렇게 3.8선을 넘은 것은 최초로 기록됐다. 북조선은 카터 일행의 방북을 환영했다. 평양의 호텔에서 쉬고 그 이틑날 아침 일찌기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미국과 평화롭고 친선관계를 갖기를 원하며 전쟁은 생각할 수 없다고 대답하자 카터는 북의 핵개발을 중단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김일성주석은 할수 있다고 응답했다. 그 때 김주석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서슴없이 승락했다. 카터의 사명은 성공했다.

 

카터는 호텔에 돌아와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즉시 국제전화로 연결하여 김일성주석과의 회담은 원만하게 됐고, 미국이 원하는대로 승락한 것을 전달하면서 전쟁준비를 중단하라고 충고했다.

 

카터는 그 때 동반했던 CNN 테레비죤 기자들과 인터뷰를 통해 김일성주석과의 회담이 만족스럽게 진행된 것을 밝혔다. 이 소식은 전세계에 보도됐다. 카터 일행은 곧 미국으로 돌아 왔다. 돌아와서 카터는 다시 클린턴 대통령과 상담했고, 북조선과 교섭하는 것을 계속할 것을 주장했다. 카터는 북미교섭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칼루치(gallucci)에게 북은 핵개발을 중단하고 유엔 검찰관의 체류를 허락했다고 전했다. 칼루치는 그 보고를 클린턴 장관회의에 보고하자 모두들 폭탄선언이라고 환영했다.

 

그해 78일에 제네바에서 북미교섭 3단계가 지속되어 회담이 1021일에 끝났다. 그들의 합의서에 대표들이 서명했다. 그 공동합의서의 중요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북조선은 핵개발을 중단한다. 그리고 유엔사찰단이 계속 북에 체류한는 것을 허락한다.

2)    미국은 여러나라를 동원하여 북에 경수로 2개를 2003년까지 건설한다.

3)    미국은 경수로들이 완공될 때까지 매년 50만톤의 원유를 제공한다.

4)    미국은 북을 핵무기와 모든 무기를 사용하여 침략하지 않는다.

5)    북조선은 남한과 대화를 재개한다.

 

북조선 대표 강석주는 이 공동합의서는 역사적인 귀중한 문서라고 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북조선의 외교성공으로 자평했다.

 

세계 최대강국과 11의 입장에서 교섭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합의서에 의해서 약속한 대로 경수로 건설에 돌입했고 원유도 공급하기 시작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합의서를 보장하는 친서를 국무장관 알 브라이트가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도록 미행정부는 결정했다. 사실은 클린턴 자신이 평양을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대통령직에서 끝났고, 공화당의 죠지 더블유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클린턴의 방북대신에 알 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대신하여 방북하게 되었다.

 

부시 대통령이 등장하면서 클린턴 정부가 이룩하여 놓은 외교정책은 지속되지 못했다 부시는 이라크와 이란과 함께 북조선을 악의 축이라고 명명하면서 미국과3나라 사이는 긴장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부시는 사실도 아닌 대량학살무기(WMD)가 이라크에 있다고 주장하며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과 적대적인 나라들은 언제나 핵폭탄을 선제공격으로 타격할 수 있다고 공포했다.

 

북조선은 이렇게 돌변한 환경속에서 다시 핵개발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조선의 핵개발은 착오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1,2,3차 핵실험을 성공시키고 인공지구위성 발사를 성공시키면서 핵보유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미 당국자들은 북의 핵개발을 취소할 것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부시의 협박정책은 오바마 행정부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어 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 행정부가 이룩한 제네바 조약으로 환원해 돌아가야 한다. 제네바 조약은 북미평화족악의 전초라고 볼 수 있다. 북미평화조약은 코리아반도의 평화, 또는 아시아의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얼마전에 푸란시스코 교황이 남한을 5일동안 방문하여 코리아반도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한바 있었다. 그의 서울방문 마지막날 명동성당에서 수천명이 모인 가운데 감동적인 작별예배를 보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 북조선 인민들과 대화하십시요. 그들은 형제와 자매입니다. 그들과 대화하십시요.”라고 강조했다. 참석한 신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뜻밖의 충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난 40년간 북의 인사들과 대화를 주고 받아 왔다. 1981년에 시작한 해외교포 기독인과 북의 기독인의 대화를 구라파에서 10년간 지속해 왔다.

 

10년간의 대화 결실은 무엇인가.

 

우선 3개 교회들이 평양에 건설되었다. 봉수교회는 교인들이 증가하여 수년전에 교회당을 배로 증가해 새로 지었다. 또한 성경이 출판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김일성종합대학교에 종교과가 개설되었다. 세상 떠난 홍동근 목사가10년간 해마다 기독교 신학과 성경에 대한 강의를 해 왔다. 또한 북의 백과사전에 종교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한 맑스주의의 정의를 교정하여 종교도 사회발전에 공헌할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북에는 기독교와 불교, 천도교가 활발하게 실천하고 있어 종교의 자유를 증명해 주고 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북조선이 미국의 적이라고 큰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후란시크코 교황의 충고는 정당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과오를 버리고 후란시스코 교황의 충고를 받아들여 북조선과 대화하고 평화협정을 맺어 코리아반도와 아시아 지역에서 평화를 이뤄야 한다.

 

그 길이야 말로 오바마 대통령이 수여받은 노벨평화상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이제 2년 정도면 임기가 끝난다. 오바마는 서둘러서 북미평화협정을 맺고 평화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수 있고, 전쟁을 즐기는 미국의 이미지를 다소나마 바꿀수 있을 것이다.

 

반세기 이상 끌고 온 정전협정을 하루 속히 북미평화협정으로 바꾸어 대통령 자신도 역사에 빛나고, 미국 자체도 어두운 역사를 밝은 역사로 향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을 이룰 때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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