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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1]친미독재와 부정축재로 엉망된 <튀니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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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7-31 10:35 조회2,0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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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71번째 나라로 중동지역이 <튀니지>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면서 이 나라는 프랑스 식민지 75년의 참혹한 역사를 가진 배경과 단 두명의 대통령이 55년간
통치해 온 친미독재와 부정축재로 점철되어 왔다고 지적하면서 특히 벤 알리 대통령이 나라를 망쳤다고
진단한다. 그의 71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71]친미독재와 부정축재로 엉망된 <튀니지>역사



프랑스 식민 75년, 독립한 뒤 단 두 명 대통령이 55년간 통치
친미독재와 부정축재로 튀니지를 망친 벤 알리 대통령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튀니지는 북아프리카 대륙 끝에 위치한 나라인데 면적이 162,150km2이며 조국반도의 ¾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다. 하지만 튀니지는 북 아프리카의 보물 상자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랍세계와 가교의 역할을 하면서 번성했던 나라이며 풍부한 문화유산으로 가득하다.

튀니지는 고대 카르타고 제국의 전성기를 BC 4세기경에 이루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에 의하여 멸망했으며 그 후에 비잔틴, 아랍 이슬람, 오스만 그리고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다민족의 다양한 문명을 수용하면서 발달시켜 나갔다.

튀니지는 영화 스타워즈, 글래디에이터,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배경이 된 광대한 사막과 이국적인 건축물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 같은 튀니지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튀니지의 해변마을에는 하늘보다 푸른 지중해의 바람이 골목마다 가득한데 이곳의 단골카페에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의 체온이 담긴 곳으로 유명하다.

튀니지는 분명 아프리카 대륙에 속해 있는 나라이지만 남유럽의 짙은 잔상들로 가득 차 있는 지중해 해변의 나라이다. 소설가 모파상, 화가 파울 클래등이 살다 간 시티 부사이드는 그리스의 산 토리니섬을 닮았다고 해서 “튀니지의 산토리니”로 불린다.

튀니지에는 세계문화의 유산인 1300년의 역사가 담긴 이슬람 지투나 모스크 사원이 있고 모자이크로 유명한 바르도 박물관이 있다. 튀니지는 이슬람의 4대 성지이며 또 로마의 콜로세움에 버금가는 원형경기장도 있다. 또 튀니지는 올리브 생산으로 세계 2위 국가이기도 하다.

튀니지의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었으나 카르타고 제국과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또 아랍의 지배 하에서 오랜 세대를 지냈음으로 아랍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다. 튀니지의 대다수 인종은 아랍인이며 순수 베르베르인은 1%정도 밖에 안 된다.

오랜 세월동안 정복자들의 지배를 격음으로 혼혈이 생겨났고 튀니지 남부에서는 흑인의 혼혈까지도 섞여 있으며 유대인도 함께 살고 있다. 튀니지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며 프랑스의 영향으로 북아프리카에서는 가장 서구화된 나라이다. 국어는 아랍어이지만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식층이 많이 있다.


1. 한니발 후예들의 고대 역사



기원전 814년경에 카르타고 제국이 건설되어 시칠리를 중심하여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신흥 세력으로 등장한 로마가 시칠리의 패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제국과 전쟁을 일으켰다.

기원전 264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됐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이 군대 기병과 코끼리 40마리의 수송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지나 알프스를 넘는 과감한 승리의 행진을 계속 했다. 한니발 장군의 군대는 로마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하지만 한니발 장군의 승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의 반격이 시작 되였으며 카르타고 제국의 항전과 봉기가 잇달았다. 로마제국의 군대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기원전 202년에 62년간 계속된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완전히 끝났다.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여 로마제국의 제2의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제국은 카르타고의 재기를 철저히 봉쇄하기 위하여 대학살과 추방을 자행했으며 불에 탄 카르타고 시에 몇 겹의 소금을 뿌려 다시는 풀 한 포기도 자라나지 못 하게하는 무서운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카르타고 제국의 멸망 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한니발의 후예들은 튀니지인 이라고 하는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 되였으며 튀니지 영토는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고 말았다. 이 때 리비아도 튀니지와 함께 로마 제국의 통치령이 됐다.


1)로마 통치시대 (기원전 146년- 647년)


기원전 146년에 카르타고 제국이 무너지고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 튀니지는 로마 제국에 예속된 “아프리카 주” 로 간주되었으며 로마 제국의 제2 도시가 됐다. 뿐만 아니라 튀니지는 로마의 주요 곡창지대가 됐으며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라틴문화권의 지배와 기독교화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한때 기독교국이 됐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튀니지는 농업이 발전하여 곡식 생산이 1년에 100만 톤이었으며 올리브와 대리석, 귀금속 그리고 희귀한 동물 수출 등으로 로마제국의 보물창고의 역할을 수백 년 동안 하고 있었다.

하지만 395년에 로마 제국은 분열되었다. 서로마와 동로마 (비잔틴)로 분열되어 두개의 제국이 팽팽히 병존하고 있었다. 튀니지는 서로마 제국에 그대로 종속되어 94년 동안 서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동서로 분열된 로마제국은 당당했던 위세가 점점 쇠퇴해 지면서 특히 서로마는 급격히 쇠퇴해 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는 혼란 속에서 튀니지의 운명은 요동치고 있었다. 서로마가 점점 쇠퇴해지고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게르만계통에 속하는 반달족이 439년에 튀니지를 침공하여 반달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왕국은 534년 까지 95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했다.

서로마가 점점 쇠퇴해 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로마제국인 비잔티움은 위대한 통치자 유스티아누수 황제가 등극하여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서 승리한 동로마제국은 동고트족을 서로마 제국의 이탈리아반도에서 몰아내었다.

뿐만 아니라 동로마제국은 튀니지를 침공하여 95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하고 있는 반달족을 또한 튀니지에서 534년에 몰아냈다. 반달족을 튀니지에서 몰아내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튀니지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튀니지는 서로마제국의 통치권에서 부터 벗어나 이번에는 동로마제국에 예속됨으로서 통치자의 변화에 불과 했다.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은 튀니지를 647년 까지 113년 동안 통치했다.


2) 이슬람의 통치 시대 (647년-1574년)

동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는 튀니지를 이번에는 바그다드의 아랍 이슬람 세력이 647년에 또 다시 튀니지를 정복했다. 튀니지를 정복한 바그다드의 아랍 이슬람은 칼리프를 섬기는 전통적인 시아파 이슬람이었다.

튀니지를 정복한 시아파 이슬람은 670년에 북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이슬람 도시인 카이르완 도시를 튀니지에 건설했다. 그리고 이 카이르완 도시에 북아프리카에서 최초의 무슬림 성당, Great Mosque를 건축했다. 이 최초의 무슬림 성당은 건축규모의 웅대함과 설계의 예술성에 있어서 서방의 무슬림 세계에서 으뜸가는 Mosque로 유명 하다. 튀니지에서 서방 기독교의 잔재는 쇠약해지고 말았다.

아랍 이슬람의 통치하에서 튀니지에 농업을 위한 관개공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물 공급을 위한 수도공사, 올리브 재배, 웅대한 궁전건축 등으로 가득 찬 화려한 이슬람 문화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아랍 이슬람이 튀니지를 927년 동안 통치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수 없이 많은 왕조들의 내전으로 인하여 흥망성쇠가 항상 교체되고 있었는데 그 흥망성쇠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Aghlabid왕조의 통치 800-900년, Fatima왕조의 통치 909년-972년, Zairids 왕조의 통치 972년-1148년, Hammaid왕조의 통치 1015년-1152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rmflrh Banu Hilal왕조와 Baber Hafsids왕조가 1230년 -1574년 까지 튀니지를 통치함으로 바그다드 이슬람의 927년간의 통치시대는 모두 끝났다.


3)오스만 제국의 통치시대 (1574년-1881년)


바그다드 이슬람의 튀니지 통치시대가 끝나자 스페인이 튀니지를 통치하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침공은 오스만 제국의 위세에 밀림으로서 즉시 떠나가고 말았다.

터키의 오스만 제국이 튀니지의 종주국이 되어 307년간 통치했다. 터키의 오스만 제국의 침략 초기에 파샤 군사령관이 파견되어 튀니지를 통치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럽 열강들의 잦은 침략과 방해로 인하여 오스만의 세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터키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권은 베이 총독을 튀니지의 통치자로 임명하여 베이 총독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베이 독은 유럽 세력을 차단하는 통치수단으로 튀니지에 어용으로 왕조를 세웠다.

1705년에 오스만이 세운 베이 총독 하에서 튀니지에 후세인 왕조가 들어섰다. 후세인 왕조는 252년 동안 튀니지를 통치했는데 항상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의 세력 사이에서 줄 당기기의 불안한 통치를 했다. 그리고 1837년에 즉위한 아호메드 왕조는 서구화 정책이 튀니지의 부국강병의 정책임을 절감하고 서구화 정책을 점차적으로 시행했다.

1861년에 튀니지 아호메드 왕조는 새로운 헌법을 튀니지에 도입하여 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입헌국가로 기록됐다. 하지만 1864년에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으로 튀니지의 서구화 정책은 일단 좌절됐으며 이로 인한 혼란 속에서 튀니지의 경제는 파탄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튀니지에는 전염병인 흑사병이 전국에 퍼져서 암혹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1784년-1820년에 이르는 사이에 튀니지는 국가적인 혼란과 파국에 이르고 있었다.

1878년에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 완전히 패하여 오스만의 세력은 튀니지에서 쇠퇴되고 유럽 나라들에 의한 자본주의의 투입과 유럽문화가 빠르게 튀니지에 침투했다.


4) 프랑스의 통치시대 (1881년-1956년)

오스만 제국이 쇠약해지고 튀니지에 대한 통제력이 마비됨에 따라 1869년에 튀니지는 서방으로 부터 경제 파산국으로 판정을 받았다. 1878년에 베를린 비밀회의에서 프랑스, 영국 및 이태리 간에 튀니지에 대한 이권을 놓고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1881년에 세 나라들 간에 밀약이 성사됨으로 영국은 키프러스를 차지하고 프랑스는 튀니지를 통치하기로 합의를 함으로 실질적으로 튀니지는 프랑스의 손으로 넘어갔다.

튀니지에 대한 통치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프랑스는 튀니지에 현존하고 있는 오스만 베이 총독을 축출하기 위하여 프랑스군 36,000명이 튀니지에 주둔 했다.프랑스는 오스만 베이 총독을 축출하고 튀니지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당시 튀니지에는 프랑스인이 34,000명 있었는데 1945년경에 튀니지에 거주하고 있는 프랑스인의 수는 약 144,000명 이었다. 프랑스는 75년간 튀니지에 대한 식민통치를 했다.


2.튀니지의 민족운동과 독립 쟁취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튀니지에서 민족운동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시작됐다. 튀니지 민중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튀니지인들의 정치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튀니지의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저항은 구체화 되여 1920년에 <데스투르당>이 창당 되였다.

<데스투르당>은 프랑스 식민통치정권을 상대하여 투쟁을 전개하면서 튀니지인들의 동등한 정치참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0년간 저항 운동을 지속한 후에 1930년에 이르러 하비브 부르기바 (Habib Bourguiba)가 주도하는 민중저항운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면서 또 다시 새로운 정당을 창당했다.

새로 창당된 정당은 <신 테스투르당>이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튀니지에서 모든 정치활동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 테스투르당>은 해체를 당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 <신 테스투르당>은 복당되어 마테리를 대표로 하고, 하비브 부르기바는 사무총장이 되여 튀니지의 독립운동은 줄기차게 계속했다.

튀니지 민중의 독립운동이 성숙해짐에 따라 프랑스는 할 수 없이 1956년 3월 20일에 무하마드 8세를 튀니지의 국왕으로 하는 조건하에서 독립에 합의를 했다. 독립을 쟁취한 튀니지는 무하마드 8세의 왕정 하에서 하비브 부르기바가 총리로 선출됐다.

하지만 튀니지의 <신 테스푸르당>을 창당하여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끝까지 영도한 하비브 부르기바 총리는 프랑스가 승인한 무하마드 왕정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왕정 밑에서 총리직에 만족할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르기바 총리는 다음 해 인 1957년에 프랑스가 승인한 왕정제도를 폐지하고 대통령 제도를 새로 채택함으로서 완전한 독립국으로 <튀니지 공화국>을 창건했다.

하비브 부르키바 총리는 1959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사회주의 정책을 기본으로 삼는 정책을 채택하여 튀니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북아프리카에 또 하나의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으로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부르키바 대통령이 처음에는 사회주의 정책을 기본정책으로 삼고 집권을 시작하기는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부르키바 대통령의 통치형태는 모호해 졌다.

1970년대 초에 이르러서 친서방적인 자본주의와 온건 자유주의를 혼합한 불투명한 정치노선으로 변질하여 전락하고 말았다.

튀니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하비브 부르키바 대통령에 대한 약력과 그의 사회주의 정치노선이 변질된 성향과 통치능력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알아본다.


ㄱ) 부르키바는 1903년 8월 3일에 튀니지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집안에 태어났는데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반프랑스 정치활동을 한 협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부르키바는 민족주의적 가정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통치하의 명문대학에서 수학하고 1920년에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 당시 튀니지 조국의 암울했던 상황과는 달리 그는 프랑스에서 자유적이고 낭만적인 정치사상에 일시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1919년에 미국의 Wilson 대통령의 그 유명한 <민족자결주의>가 조국반도에서3 1운동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튀니지에서도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기틀이 되고 있었다. 1924년에 튀니지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일으키는 소요가 발생하여 독립운동의 불이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부르키바는 튀니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족주의자들의 새로운 정치운동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32년에 부르키바는 <튀니즈 액션> 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독립운동에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키바가 언론을 통하여 주장하는 독립운동 논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변에 불과했다.

부르키바는 <튀니지의 독립과 프랑스의 유익을 보장하는 상호 조약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여 독립운동정신에 있어서 원리에 맞지 않는 주강을 하고 있었다.

ㄴ) 1938년에 튀니지에서 프랑스를 반대하는 폭력시위가 격화되자 프랑스는 정치적 탄압을 시작하여 부르키바를 체포하여 프랑스로 이송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부르키바를 체포하여 프랑스로 이송하는 절차는 솜방망이를 들고 치는 연극에 불과했다.

1940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에 있던 부르키바는 재빠르게 연합군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힘으로서 프랑스와 미국의 호감을 받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10여년 만에 부르키바는 귀국했다. 튀니지로 귀국한 부르키바는 1955년에 재빠르게 신 헌법당과 노동조합 그리고 기타 민족주의 운동단체들과 연합을 이끌었다.

부르키바가 이끄는 운동세력은 농민, 학생, 노동조합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그때 당시 튀니지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요구는 전국적으로 극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키바는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는 베트남에서의 패배와 튀니지 내부에서 무장투쟁 그리고 UN의 압력에 의하여 1955년에 튀니지의 왕정을 승인하여 자치정부를 허락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부르키바는 튀니지 독립 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던 것이다.

ㄷ) 튀니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부르키바 대통령은 프랑스의 자유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장본인이다. 그리하여 튀니지에서 307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이슬람전통을 무리하게 탈피하여 튀니지를 세속화하려는 강력한 정책을 부르키바 대통령은 내세우고 있었다.

전통적 이슬람 사원을 교육성 산하에 두는 조치, 이슬람 종교학교를 공립학교 제도로 개편하는 조치, 이슬람 여성의 이혼을 합법화하는 제도 그리고 이슬람교의 금시기간인 라마단을 금지했는데 그 이유는 산업 생산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기도기간을 폐지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파극적인 정책을 무리하게 강제로 추진했다.

그러면서 부르키바 대통령은 통치의 기본 이념을 <사회주의 지향적 통치이념> 이라고 크게 선전했다.

하지만 부르키바 대통령이 튀니지의 이슬람전통의 가치관을 무리하게 깡그리 묵살하는 통치행태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통치이념>이라고 선전을 할 때 과연 그 누가 부르키바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받아 드릴 수 있었겠는가?

부르키바 대통령이 프랑스 영향 하에서 반 이슬람전통과 서구화된 자본주의적 혼합된 경제체제를 채택함으로 인하여 자연히 발생한 고용 불안과 보직 보장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점이 발생하여 지배층은 물론 민중들의 신뢰도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러한 가운데 부르키바 대통령의 집권 세력 안에서 부패가 날로 극심해 짐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산 됐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부르키바 대통령이 친 프랑스 서구화된 식민주의자들이 남겨 놓은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1978년에 발생한 반정부 민중시위에 대하여 부르키바 대통령은 오히려 좌익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주도한 반국가 시위라고 엉뚱하게 불평을 하면서 이슬람의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인 기도 의식마저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981년에 부르키바 대통령은 반대세력을 일시 잠재우기 위하여 다당제를 합법화했다. 자본주의 침투를 위하여 단골메뉴로 들고 나오는 것이 바로 다당제의 도입인데 부르키바 대통령도 다당제를 통치수단으로 받아 드렸다.

1975년에 자기 자신의 종신집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했던 부르키바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부르키바 대통령이 다당제를 직접 도입했으니 그의 정치적 욕망은 모두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세계의 많은 자본주의 국가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이 부르키바 대통령도 정권 말기에 가신의 측근세력을 통한 정보 및 보안을 철저히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르키바 대통령은 가장 가까운 측근자이며 보안 대장이었던 벤 알리를 총리로 임명하여 정국의 안전을 노렸다. 하지만 부르키바 대통령이 제일 믿었던 벤 알리 총리에 의하여 무혈 쿠데타가 1987년 11월 7일에 발생하였다.

부르키바 대통령은 30년 동안 어렵게 지켜 온 권좌에서 물러났다.

3. 친미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한 제스민 혁명


벤 알리 대통령은 1936년에 튀니지 수수지방 시골에서 출생했으며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했다. 1956년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후에 벤 일리는 프랑스에 유학하여 프랑스 육군 사관학교와 포병학교에서 배웠다. 뿐만 아니라 벤 알리는 미국의 Texas에서 정보 보안 학교와 방공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벤 알리는 튀니지에 귀국하여 튀니지군 참모본부에서 근무했으며 군사 안보국장으로 승진됐다. 1974년에 주모로코 주재 무관으로 근무했으며, 1977년에 국방장관, 1980년에 주바르샤바 대사, 1984년에 국가안전국 장관, 1986년에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벤 알리는 하비브 부르키바 대통령의 최측근자로 인정받았으며 1987년 10월에 튀니지의 국무총리, 수상으로 등용됐다.

그런데 벤 알리는 1987년 10월에 국무총리로 등용된 지 한 달 후인 11월 7일에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부르키바 대통령을 축출하고 튀니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하비부 부르키바 대통령은 굳게 믿었던 부하이며 대통령의 최측근자로 신임을 했던 벤 알리에게 배신을 당하여 무혈 쿠데타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부르키바 대통령은 외국으로 추방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국내에서 감금되어 굳은 침묵 속에 살다가 2000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전임 부르키바 대통령이 선택한 친미노선에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강화해 친미주의적 통치자로 등장하여 3선까지 허용한 헌법을 또 다시 고쳐 5선을 허용하여 무한정 독재자로서 23년째 집권을 하고 있었다.

튀니지는 본래 시아파 이슬람국이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아랍 이슬람의 통치하에서 수니파 무슬림 나라로 변했다. 전체 인구의 98%가 수니파 무슬림이며 기독교는 1%에 불과하다.

벤 알리 대통령이 친미독재정치 23년 동안에 튀니지 민중에게 안겨 준 유산은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발생하는 천대받는 민중들의 굶주림이 사회적 불안정을 조성하고 있었다. 빈부의 격차로 굶주리고 천대받는 튀니지 민중들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지만 벤 알리 대통령 정권의 개선과 전향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벤 알리 대통령에 대한 튀니지 민중들의 분노보다 그 이상으로 튀니지 사태에 대하여 크게 염려하고 문제시하고 있은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2008년 6월 23일에 그때 당시 주튀니지 미국대사인 Robert F. Godec 대사가 미국정부에 제출한 극비의 비보고서에 의하면 벤 알리 대통령의 폭정과 이로 인한 튀니지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Robert Godec이 튀니지의 위기상황에 대하여 미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는 극비에 속하는 비밀문건으로 구별되어 2018년 까지 10년 동안 비공개 비밀문건에 해당된다.

하지만 Wikileaks에 의하여 2010년에 폭로 되였으며 미국이 3세계에 대하여 비밀공작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낱낱이 전 세계에 폭로했다.

Wikileaks가 폭로한 튀니지의 위기상황과 벤 알리 대통령의 불법적인 통치행위 에 대하여 미국정부에 보고한 내용을 간략하게 #4로 나누어 요약하여 기술한다.

#1. 튀니지 벤 알리 정권의 부패는 심각하다. 튀니지 정부의 부패는 행정부 고위급에서 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꽉 차 있으며 외국 투자의 감소와 실업자의 증가 그리고 물가의 상승 등으로 심각하다.

교통경찰에게 뇌물로 건네주는 돈의 액수가 20 dinars면 만족했는데 지금은 50dinars를 뇌물로 주어야만 교통법규 위반에서 무사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부패가 튀니지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으며 튀니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2. 벤 알리 대통령의 가정의 부패는 튀니지 국가의 부패와 직접 연계되어 있다. 튀니지 대형 기업체중 50%이상이 벤 알리 대통령의 일가친척들의 소유물이다. 벤 알리 대통령 혈통의 일가친척들과 벤 알리 대통령이 이혼한 전처의 일가친척들 그리고 재혼한 현재의 처가집 식구들이 튀니지 정권의 중요한 부분을 모두 다 독차지하고 있다.

벤 알리 대통령의 일가친척들은 튀니지 사회에서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은 층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니지의 종요한 산업분야에서 50%이상을 대통령의 일가친척들이 모두 다 차지하고 있으며 비정상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튀니지의 막강한 부동산 사업체들을 강점하고 있다. 튀니지의 두 방송국, 항공회사, 많은 호텔의 운영, 자동차 조립공장, 식품공급회사들을 벤 알리 대통령의 혈통의 친척들과 처가 계통의 식구들이 모두 다 독점하고 있는데 그 외에 더 많은 수들을 일일이 기록할 수 없다.

#3. 벤 알리 대통의 가정과 친척들의 부귀와 낭비는 엄청나다. 튀니지 민중들의 빈곤과 굶주림의 원인과 이유를 대통령 일가들의 부귀와 사치행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벤 알리 대통령의 두 번째 부인 레일라의 사치와 탐욕은 민중의 분노를 일으킨다.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약 5억 파운드(6조 2000억 원)로 추산되는데 이 돈을 프랑스의 한 은행에 비밀로 보관되어 있고 민중들의 실업률은 40%를 웃돈다.

Robert Codec 주튀니지 미국대사가 직접 목격한 벤 알리 대통령의 사위 마테리의 개인 주택은 미국인으로서 상상을 초월한 호화로운 주택이며 정부의 지원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50m 길이의 수영장과 호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고 있다.

이와 같은 대통령 일가의 부패와 폭정에 대하여 튀니지 민중의 탄식의 소리는 어떠한가? <튀니지는 마피아가 통치하는 나라이다>라고 탄식한다. 하지만 이런 탄식의 소리도 마음속에서 할 뿐이며 만일 큰 소리로 탄식을 하면 경찰에 붙들러 가게 된다.

#4. 2006년에 벤 알리 대통령의 조카 2명이 프랑스의 최고 갑부인 Bruno Roger의 소유인 고급 유람선을 도둑질하여 갈취한 후에 페인트 색칠과 구조를 완전히 변경하여 소유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몇 년 후에 모든 것이 발각되어 대통령의 조카 2명은 법정에 출두하게 됐다. 하지만 튀니지 법정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처리하여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위의 #1-#4의 폭로기사들은 튀니지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벤 알리 대통령의 일가친척들의 튀니지 은행과의 불법거래 행위와 증권회사에서 조작행위를 통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 드리는 불법행위는 튀니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 공공연한 비밀에 대하여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벤 알리 대통령 외에는 튀니지에 아무도 없다. 위에 간추린 #1- #4의 비밀보고서 문건들은 2008년에 그 당시 주튀니지 미국대사 이었던 Robert Codec 대사가 튀니지의 정치적 부패와 위기상황에 대하여 미국 정부에 보고한 비밀 보고서이며 2018년까지 비밀로 처리되고 있는 문서이다.

미국정부가 2018년까지 비밀문서로 처리하고 있는 것을 Wikileaks가 2010년 폭로한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Wikileaks의 폭로가 아니더라도 2011연에 발생한 <제스민 혁명>을 통하여 벤 알리 대통령이 지난 23년간 저지른 불법행위와 정권의 부패에 대하여 낱낱이 폭로됐으며 부패에 대한 심판은 완전히 성취됐다.

<제스민 혁명>은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튀니지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튀니지의 나라꽃인 국화 제스민에 빗대어 <제스민 혁명>으로 불린다. 혁명의 성공으로 인하여 1987년부터 23년간 튀니지를 통치한 벤 알리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하였다.


<제스민 혁명>혁명은 어떻게 처음에 발생했나?



2010년 12월 17일에 튀니지의 중부에 있는 시드 도시에서 실직자 모하메드가 과일과 야채를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노점상을 하고 있는데 노점상허가가 없다고 경찰에게 무조건 물건들과 저울까지 몰수당할 뿐만 아니라 구타까지 당했다.

모하메드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튀니지 사회에서 대학졸업자들이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로 어려운 일이였으며 모하메드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노점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점상 허가를 받는 것도 불가능한일 이었다.

경찰의 부당한 단속과 폭행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민원을 제기했지만 아무 소용없이 냉담한 거절만 당했다. 모하메드는 튀니지의 구조적 불의에 대하여 목숨으로 항의하기로 정의로운 결단을 했다.

모하메드는 1010년 12월 17일에 지방청사 앞에서 휘발유를 몸에 둘러쓰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을 했다. 그 후에 그의 가족들과 민중들이 항의하는 시위가 벌여졌으며 분개한 민중들의 항의하는 시위가 점점 커지자 facebook을 비롯하여 전 세계로 <제스민 혁명>의 뉴스가 확산됐다.

병원에 입원중인 모하메드를 벤 알리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여 치료를 당부했다. 하지만 모하메드는 2011년 1월 4일에 26세의 나이로 결국 사망했다.

튀니지의 <제스민 혁명>을 <굶주림의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조국반도 남녘에서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에 22세의 나이로 분신자살을 하여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한 조국반도 남녘의 <혁명의 불꽃>이 튀니지에서 다시 꽃피우게 됐던 것이다.


<제스민 혁명>은 어떻게 전개됐나?


2011년 1월 5일에 모하메드의 장례식이 민중의 대거 참여로 성대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경찰의 저지와 발포로 인하여 행진이 저지당했다. 분개한 군중들은 경찰서, 은행과 정부청사를 공격하여 불을 지르고 화염병을 투척하여 극렬 항의로 확대 발전됐다. 경찰의 발포로 인하여 시위에 참가한 66여명이 사망하는 사태로 발전 됐다.

2011년 1월 14일에 노조의 파업이 시작됐고 정부는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사태의 위급함을 감지하고 성난 파도처럼 물결치는 6만 5천명의 시위 군중의 분노를 일시 잠재우기 위하여 2011년 1월 14일 오후에 TV방송 연설을 했다.

벤 아리 대통령은 TV방송을 통하여 2014년에 예정된 대통령 재선에 절대로 재출마를 하지 않고 퇴임을 하겠다고 맹서했다. 국민에게 맹서로 약속한 퇴임을 반드시 실행하겠으니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벤 알리 대통령의 다급한 TV방송의 맹서를 그 누가 믿겠는가?

벤 알리 대통령은 사태의 위기를 솔직히 시인하고 즉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벤 알리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함께 급하게 23년의 권좌를 포기하고 2011년 1월 14일 TV방송을 한 바로 그날 밤에 해외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벤 알리 대통령이 망명의 길을 급하게 떠나간 후에 국내외적으로 제일 크게 떠오르는 관심사는 벤 알리 대통령의 부정축재가 얼마나 되는 가였다. 쉽게 알려진 것들을 우선 소개한다.

ㄱ. 스위스에 은닉한 재산은 제네바의 고급 빌딩 한 채와 팰컨 9000 제트기 한대, 그리고 여러 은행들에 분산된 돈 6천 9백만 달러를 스위스 은행이 동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그 외에 숨겨 놓은 막대한 돈의 행방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3년이 걸린다고 발표했다.

ㄴ. 프랑스 파리에 시가 560억 원의 고급 아파트가 있다. 알프스에 스키장과 고급 호화로운 별장을 소유했다. 프랑스 정부는 벤 알리 대통령의 개인 소유인 비행기 한대를 압류하고 있다. 프랑스 은행에 대통령 부인의 이름으로 현재 알려진 것만도 수백만 유로화라고 했다.

재산관리 국제 민간단체의 윌리암 대표는 말하기를 <지금까지 알려진 벤 알리 대통령 일가의 은익 재산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ㄷ. 벤 알리 대통령이 미국에 숨겨 놓은 부동산과 돈도 역시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벤 알리 대통령의 처남과 사위는 기아자동차를 비롯하여 미국의 유명자동차의 수입 독점권을 모두 다 독점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척하여 미국, 스위스, 프랑스 그리고 남미 은행들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벤 알리 대통령 일가는 여러 가지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440억 달러 규모의 부정축재를 했다고 평가했다. 벤 알리 대통령의 재산은 캐나다 은행에도 2,000만 달러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벤 알리 대통령이 26년의 독재정권을 포기하고 2011넌1월 14일 밤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의 길을 떠나갔다. 벤 알리 대통령이 황급히 떠나갈 때 대통령궁에 숨겨 놓은 수백만 달러의 현찰뭉치와 귀금속 보석뭉치, 다이아몬드 등을 고스란히 남겨 놓고 황급히 떠나갔다. 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대통령 부인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갈 때 670억 원에 해당하는 금괴를 빼돌려 가지고 떠나갔다고 한다.

벤 알리 대통령이 떠나간 후에 2011년 1월 17일에 튀니지 과도정부가 출범하여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재야인사들이 대거 입각하여 과도정부를 1월 26일에 수립했다.

튀니지 과도정부의 형사법원은 축출된 벤 알리 전 대통령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011년 2월 17일에 AFP 통신은 벤 알리 전 대통령이 뇌졸중을 일으켜 혼수상태에 빠져 있으며 회복이 불확실하다고 보도했다.

그러니 튀니지의 과도정부 형사법원이 혼수상태에 빠진 벤 알리에게 35년 징역 형의 선고를 내렸다고 한들 혼수상태에 빠진 자에게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벤 알리 전 대통령은 그가 저지른 잔악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튀니지 과도정부로부터 <인벌>을 받기는 했으나 아마 그 전에 벌서 먼저 하늘의 <천벌>을 받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글을 끝맺으며,




벤 알리 튀니지 전 대통령이 미국의 최고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일은 4 19혁명 후 이승만이 늙은 몸으로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던 일과 흡사한 일이다. 남녘에서 지금도 이승만 동상을 세우자는 얼빠진 소리가 들여오니 튀니지 민중들에게서 교훈을 다시 배워야 하겠다.

튀니지 <제스민 역명>은 미국이 중동에서 지배세력이 되고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마음 놓고 지원하기 위하여 팔레스타인을 억압하고 있는 미국의 쇠사슬에 대하여 철퇴를 강요하는 혁명이다.

<제스민 혁명>은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반제 반미의 투쟁이 숨 쉬고 살아 있다는 증거를 분명히 새롭게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튀니지의 혁명은 반제반미 싸움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싸움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튀니지 종주국 이였던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세력과 중동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제스민 혁명>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왜곡하고 축소화함으로 튀니지 민중이 주도한 혁명의 목적과 위력을 애써 묵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반도 3/4에 불과한 작은 나라 튀니지에서 발생한 <제스민 혁명>에 대하여 미국이 그렇게도 긴장하고 묵살하려는 까닭이 무엇일가?

<제스민 혁명>의 영향이 중동과 아랍세계에서 “친미철통독재자”들의 혼을 빼놓는 엄청난 사건이 됐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테러와의 전쟁에 앞장선 벤 알리 대통령이 26세의 무명의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위하는 민중들의 항의의 힘에 의하여 불과 한 달 안에 친미철통정권을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

벤 알리 대통령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시위하는 군중들에게 “테러리스트” 라고 낙인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성난 군중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벤 알리 대통령을 향하여 <친미 마피아 물러나라>라고 외쳤다.

튀니지 제스민 혁명이 중동과 아랍세계의 인근 국가들에게 확대되고 있다. 쉽게 보이는 이웃 나라는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예멘, 요르단, 지부티 나라들이며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알바니아 수도인 티라나에서 2만 명이 친미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반정부 시위를 했다.

그런데 튀니지 <제스민 혁명>을 비롯하여 산불 모양 번지고 있는 반정부 운동들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종교와 인종문제와 직접 연관되어 발생했던 과거의 분쟁들의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과 혁명의 근본적 원인과 이유는 종교와 인종문제가 주로 아니다. 오늘의 분쟁과 혁명운동은 오직 친미독재정권들이 예속되어 있는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로 인하여 발생하고 있는 친미정권의 부패와 빈부의 격차로 인하여 제3세계 민중들이 당하고 있는 절대빈곤과 굶주림 때문에 자연발생적인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항쟁이며 <몸부림의 혁명>이라는 사실이다.

어쨌든 튀니지에서 불붙기 시작한 <제스민 혁명>은 중단됨 없이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계속 돼야 한다. 아니 오히려 제스민 혁명은 지금부터 새로 시작돼야 한다.

친미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만 물러나고 지난 55년 동안 튀니지 독재정권을 지원해준 미국의 검은 손이 그대로 튀니지에 남아 있으면 안 된다.

벤 알리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기생하여 온갖 권력을 누리고 있던 낡은 정치인들이 멀쩡하게 여전히 새로 출범한 튀니지의 과도정부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지려고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들여오고 있다.

23명으로 구성된 튀니지 혁명 임시 과도정부 내각에 혁명적 인사들 뿐 아니라 벤 알리 대통령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사람들이 다수 유입되어 국방장관, 내무장관등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음으로 시위 대중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 지배자들이 지금까지 항상 튀니지의 독재자들에게 “친구”라고 말을 했던 것을 튀니지 민중들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무서운 독재와 부패한 정치를 계속하고 있는 벤 알리 대통령에게 “튀니지는 미국의 소중한 동맹국이다”라고 말해 왔다는 사실을 튀니지 민중들은 분명히 기억하고 미국에 대하여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그럼으로 지금 튀니지의 학생, 노동자, 농민, 청년, 직장인과 실업자. 지식인 그리고 여성들과 인민 대중은 자발적인 민족애의 힘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작용하여 민족적 혁명의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깊이깊이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최근 조국반도 남녘에서 2013년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자 등장한 인물 중에 한나라당의 박근혜라는 사실을 일부 신문이 보도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전태일의 혁명의 꽃이 열매를 맺어 4 19혁명이 성공했다. 하지만 아와 같이 평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오늘 이명박 정권으로 연결되어 친미 독재정권이 계승하여 집권하고 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이 관여하고 공작하는 것을 당연한 역사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또 다시 박근혜로 연장시키려는 것이 미국의 공작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한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등장과 제거, 전두환과 광주사건의 발생은 모든 것이 다 미국의 공작으로 이루어 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반도 남녘에서 <4·19혁명>의 꽃이 제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들어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어두운 역사를 교훈삼아, 튀니지의 <제스민 혁명>은 중동과 아랍세계에서 혁명의 불꽃이 영광스럽게 피어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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