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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br><br><신한민보>돕던 김헬렌 목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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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1-23 22:46 조회4,4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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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나 우즈=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김헬렌 목사(79. 본명 강혜진, 강화선)는 재미동포사회에서
최초의 여성목사들 중 한 분이다. 한국서 예수교장로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신학강의를 하다가
1966년 2월에 미국에 왔고 이 해 말에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니까 일찌기 여성목사가 된 셈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남편 김세환 선생(82)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녀(1남2녀)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
왔고, 1970년대에는 로스엔젤레에서 운영되던 민주운동 지향의 주간언론 <신한민보>를 돕는 일에 그리고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에 참가하여 민족민주운동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에 참여해 왔다. 그는 단지 1985년부터
2년 가량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에서 목회일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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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신한민보>돕던 김헬렌 목사 부부



[라구나 우즈=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김헬렌 목사(79. 본명 강혜진, 강화선)는 재미동포사회에서 최초의 여성목사들 중 한 분이다. 한국서 예수교장로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에서 신학강의를 하다가 1966년 2월에 미국에 왔고 이 해 말에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니까 일찌기 여성목사가 된 셈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남편 김세환 선생(82)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녀(1남2녀)들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 왔고, 1970년대에는 로스엔젤레에서 운영되던 민주운동 지향의 주간언론 <신한민보>를 돕는 일에 그리고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에 참가하여 민족민주운동 정신을 고양시키는 일에 참여해 왔다. 그는 단지 1985년부터 2년 가량 오렌지카운티 애나하임에서 목회일에 종사한 경험을 갖고 있다.

<##IMAGE##> 이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애나하임에서 라구나 힐스, 다시 라구나 우즈로 이사를 간 김세환 장로와 김헬렌 목사 부부를 만나기 위해 5번 고속도로에 올랐다. 44마일 정도의 거리(72 킬로메터)니까 꼭 110리 길이 되는 곳이다. 찾아가는 길이 복잡하였지만 거의 다 가서 이리 저리 헤메다가 간신히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 부부는 무척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곳은 조용한 동내로 느껴졌다. 공기도 맑고 주변분위기도 아름다웠다. 주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나누고 다시 댁으로 돌아와 그 동안 적조했던 시간들에 있었던 이러 저러한 궁금한 소식들에 대하여 대화의 꽃을 피운 다음에 이들 부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의 초점을 옮겨갔다.

두분이 1970년대에 어떻게 한국민주화운동에 참여하게되었는지 궁금해 물어 보았다. 그리고 당시 민주운동 신문이었던 <신한민보>를 돕기위한 계기가 무엇인지도 물었다. 이들 부부는 70년대 <신한민보>를 구독하게 되어 김운하 사장을 알게 되었고, 김운하 사장이 음악에 관심도 많고 조예가 깊어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가깝게 지나게 되었다고 70년대 초기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그 때 김운하 사장이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문에 탄압을 받으면서 한국에 있는 그의 부인 김충자 여사를 포함하여 자녀들을 데려오지 못해 노력하고 있을 때 그를 위로하면서 사귀게 되었다"고 지난 날들을 회고해 준다.

<신한민보>지원사업에 자녀들 동원해 음악회 등 열어 지원


신한민보 김운하 사장이 이곳 미국에서 소위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는 신문사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영사관이나 어용세력들로부터 탄압을 받았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들을 데려 오기위해서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드디어 70년대 중반이 넘어서 그의 가족들이 미국에 오게 되었다. 그 때 신한민보가 재정상 아주 어려웠기 때문에 김헬렌 목사 부부는 피아노 전공하는 큰 딸(유경)과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딸(미아)를 동원하여 자매음악회를 열어주어 모금운동을 해 주었고, 행사 때마다 상품들을 내 놓고 그것들을 판매하여 돕는 일, 그리고 인쇄기가 고장나면 김세환 선생이 공구를 들고 신문사로 달려가 고쳐주는 등 여러가지로 <신한민보>를 돕기위해 동분서주 한 고마운 분들이다.

이들은 또 자녀를 일본에서 열린 해외동포통일음악회와 평양에서 열렸던 윤이상음악회에도 보내서 <사향가>를 비롯 윤이상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등을 연주하게 하면서 음악을 통해 민족민주운동에 기여해 온 부부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들 부부가 모두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의 회장직들을 맡아 봉사하면서 장준하 선생의 3남 장호준목사가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학자금을 지원하는 일에도 한 몫했다. 강헬렌 목사는 "지난 해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가 고인의 35주기 기념식을 할 때 고인의 3남 장호준 목사가 로스엔젤레스에 와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고인을 추모하는 이야기가 아직도 가슴에 찡하게 남아 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IMAGE##> 김세환 선생과 강헬렌 목사 부부가 지원했던 <신한민보>는 본래 반일투쟁을 위해 1902년 2월10일 샌후란시스코에서 당시 재미동포단체인 "국민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었다. 그 때 공립협회가 있었는데 이 단체에서 기관지《공립신보(共立新報)》가 발행되었고, 대동보국회의에서《대동공보(大同公報)》라는 기관지가 있었는데 이 두단체가 모두 해체되면서 신한민보(新韓民報)가 통합단체의 기관지로 발행되었다. 그러나 이 신문도 8.15해방이후 오랜동안 발행되지 않고 있다가 1970년대 초기 김운하 선생이 미국에 와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아 처음에는 재미동포대중신문으로 발행하다가 나중에 반군사독재를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신문으로 그리고 통일운동 신문으로 그 성격을 바꾸어 발행해 왔다. 이 신문은 90년대 말까지 발해되다가 폐간되고 말았다.

이 <신한민보>는 뉴욕의 해외한민보(서정균 발행인), 카나다의 <뉴코리아타임스(전충림 발행인)>와 함께 3대 민주화운동 언론으로 오랜 기간 재미동포사회의 통일운동,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해 왔었다. 또한 <신한민보>를 재창간한 김운하 사장과 그의 부인 김충자 여사는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었다. <신한민보>는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 로스엔젤레스 지역에서 운동권의 아지트라고 할 정도로 대부분 운동권의 모임과 계획 등이 이곳에서 이뤄지는 경우들이 많았다. 다시말하면, 재창간된 <신한민보>는 1970년대 중반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재미동포사회의 서부지역 민족민주운동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세환 선생과 그의 부인 강헬렌 목사, 이들의 삶


이들 부부를 말할 때 재미동포사회 민족민주운동 참여자들은 항상 "김헬렌 목사부부"라고 부른다. 보통은 김세환 선생부부라고 말하고 그의 부인이 강헬렌 목사라고 하여야 보통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의 순서인데 이들 부부에 대해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김헬렌" 목사 부부라고 말해 왔다. 그 사연을 알고 보니 남편 김세환 선생의 철학과도 관련이 된다. 김세환 선생은 언제나 그의 부인 강헬렌(김헬렌) 목사를 내세워 주었다. 부인은 "저 분은 민주운동에 나가면 언제나 나를 앞세웠다"고 말하면서 남편은 항상 조용하게 일했던 것이 김세환 선생의 삶의 자세로 되어 왔다고 그 배경을 말해 준다.

두분은 모두 평양출생이다. 김세환 선생(장로)은 1929년 4월24일 생으로 8.15해방이후 남녘으로 이사와서 살았다.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공부하고 학비가 없어 직장생활을 하다가 1964년 11월 미국으로 이민왔다. 한국에서는 금성사에 들어가 테레비죤 설계, 라디오 설계를 했고 한국에서 최초로 제작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제작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미국에 와서는 곧장 퍼시픽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1968년 학위를 받고 은퇴할 때까지 계속하여 전문분야에서 과학자로 활약했다. 그는 보잉회사에서 제작한 비행기 보잉-747의 커뮤니케이션(통신) 시설에 들어가는 시스템을 제작하여 미국 과학계에서도 인정받는 과학자였다. 이밖에도 햄라디오 통신기를 제작하여 이 상품들을 미국시장에 팔았던 경험도 있었다. 부인은 남편에 대해 "이 사람은 과학자이기도 하지만 서양 고전음악(클라식)에 조예가 깊다"면서 "틈만 있으면 슈벨트 가곡을 비롯하여 유명한 세계적 음악가들이 작곡한 교향곡 등을 감상하는 게 휴식을 즐기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큰딸이 17살때 이미 샌디애고 오케스타라와 협연을 같이 할 정도로 음악의 재능을 보였다. 부인은 또 "내가 한국서 신학석사까지 공부했지만 미국의 신학대학(Southern California Theological Srminary)에서 1986년 신학 박사학위(Doctor of Theology)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이들 아빠의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고 소개하면서 김세환 선생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IMAGE##> 부인 김헬렌(강혜진) 목사는 1932년 평양출생으로 1950년 12월 전쟁 때문에 18살 나이에 남녘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지금은 광나루에 있는 대한장로회신학교를 1955년에 졸업하고 전주에 있던 한일신학대학에서 신구약,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 지도방법 등에 대해 2년 동안 전임강사로 일하다가 1957년 김세환 선생과 결혼하고 1966년 2월에 남편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오게 되었다. 부인 김헬렌 박사는 신학을 전공했지만 한국에서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요즘에도 하루에 한시간씩 "바흐"곡이나 "하이든"곡 등 어려운 곡들을 연주하는데 시간을 써 왔다. 이 가정이 음악가정이라서 그런지 실내에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가 독일제 "벡스타인"이다. 아마도 이 피아노는 적어도 지금 시가로 약 5만달러 정도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부부는 8순 안팎의 나이이지만 아직도 때묻지 않은 다정다감한 소년, 소녀와 같다. 결혼생활 한지가 어언 반세기가 훌쩍넘어 54년으로 접어 들지만 그 동안 부부관계로 싸워 본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민주운동, 통일운동을 하면서도 "우리 부부는 친근한 동지"라고 말해 왔다. 이들 부부는 특히 "보통 아이들 문제로 부부가 다투고 의견 충돌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줄 아는데 우리는 남자 아이가 컴퓨터 전문가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라면서 말썽이 없었다. 그리고 큰 딸은 피아노를 전공하고도 변호사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해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국제변호사 일을 보고 있고, 둘째 딸은 바이올린 연주자로 샌후란시스코교향악단에서 단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애들이 자라면서 말썽이 전혀 없었기에 우리 부부간의 문제도 없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큰 딸 유경(에스터)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유경씨가 피아노 연주가이지만 둘째 전공으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 Irvin)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그 후에 법대입학을 위한 시험(Law school admission test)을 치르고 그 성적에 따라 샌후란시스코의 법대(UC Berkeley)에서 수학하고 법학박사(JD)학위를 받고 지난 1982년 변호사 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일해 왔다. 그런데 그 당시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전부 모여 축하연을 하는 자리에 피아노 연주 한곡을 부탁받았는데 그 때 유경씨는 "그랜드 피아노가 준비되어야 할 수 있다"면서 슬쩍 핑계를 잡았는데 행사당일 정말로 그랜드 피아노가 준비되어 즉석연주를 했는데 이 장소에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너무 훌륭한 연주였기 때문이었다. 변호사 고시에 합격했던 동료들은 "어떻게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변호사를 하려고 하느냐?"며 그의 연주를 입이 닳도록 칭찬해 주었다는 것이다. 강헬렌 목사는 둘째 딸도 하나 자랑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우리 미아는 작년에 샌후란시스코 오케스트라 단원을 뽑는데 2천4백여명이 전세계에서 응시하였는데 그 심사위원 중 한사람으로 참가해 단원을 뽑는데 참여할 정도로 이 교향악단에서 인정받는 바이오린 연주가"라고 소개한다. 김세환 선생과 강헬렌 박사의 자녀에 대한 긍지심은 대단하다. 1남2녀 모두 출가해 살고 있지만 자주 연락하고 자주 만나는 편이다. 이 가정 가족들은 모두 하나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이들 부부는 가정에 장준하 선생의 가족들 사진들을 모두 함께 큰 사진틀에 넣어 이들을 생각해 왔다. 그리고 김세환 선생은 장준하 선생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일할 때 참석자들에게 중국지도를 꺼내 장준하 선생이 일제시대에 샹하이 가까이 있는 서하에서 중경의 임시정부로 찾아가는 노정을 설명해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준바 있었다. 그 지도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며 이것을 마치도 보물처럼 여기고 있는 마음이다.


*재미동포 민족민주운동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


<##IMAGE##> 김세환 선생과 강헬렌 박사 부부는 어느 운동도 부부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재하고 "민주화 운동이나 통일운동도 부부가 함께 동지로서 참여하는게 중요하다가 강조한다. 사회운동과 가정이 유기체로 결합되어 움직여야 그것이 건전한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들 부부는 세상을 이미 떠난 김상돈 선생, 차상달 선생, 홍동근 목사, 김성락 목사, 배강웅 선생, 유상준 선생, 조광재 선생, 김정순 장로, 백학구 선생, 노성걸 선생, 임창영 선생, 정귀근 여사, 정석기 선생, 일본의 배동호 선생, 유럽의 윤이상 선생, 공광덕 박사, 정규명 박사 등 모든 분들이 그립다고 말하면서 그 중에 특히 정석기 선생의 죽음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고 말한다. 그 분의 죽음은 정신적 타격도 있었지만 일종의 "고독병"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며 조금만 일찍 알았어도 그분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지 않았나 하면서 아직도 몹시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후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이들 부부는 무엇보다 사람관계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우리 운동권 사람들도 서로 가족처럼 지내면서 기독교에서 하는 심방같은 제도를 실천하면서 남녀노소 막론하고 서로 서로 사랑하는 유기체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다. 이 말은 원로들이 후진들을 사랑해 주고, 동시에 후진들이 선배나 원로들을 존경해 주면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운동을 발전시키고 계승하여 나아가는데 있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로 하는 일을 도와주면서 살아 나가야 운동도 잘되고 사회도 잘되고 나라도 잘된다는 뜻이다. 이들부부는 운동이라는 것이 곧 사람사업이라는 철학을 시사한다.

나는 다음 일정 때문에 자리를 일어서야 했다. 김세환 선생과 강헬렌 박사는 아쉬운 표정이었다. 우리는 곧 다시 한번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김헬렌 목사와 김세환 선생 새 연락처:(949)830-8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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