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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노]강남 제비가 북과 남을 오가며 봄소식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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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04-30 22:53 조회3,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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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 크락스빌에 거주하며 재미동포동부지역연합회 회원인 이흥노 선생이 남과 북을 오가며 북으로
돌아간 비전향장기수들과 아직도 남쪽에 남아 북쪽의 고향을 그리며 살고 있는 출옥장기수들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강남 갔던 제비가 북과 남을 오가며 봄소식을 전한다.”는 수필을 민족통신에 기고했다. 전문을 싣는다.
[민족통신 편집실]



<##IMAGE##>

강남 갔던 제비가 북과 남을 오가며 봄소식을 전하다



남과 북으로 갈라진 출옥장기수들의 마음을 연결하면서

*글:이흥노 선생(메릴렌드 크락스빌 거주동포)


<##IMAGE##> 작년 초, <6자회담>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2.13합의>를 평양에서 맞이하고 나는 물론이지만 평양시민들도 대 환영을 하면서 한없이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북쪽에서 가장 명성을 날리는 학자 중의 한 분인 정기풍 사범대학교수와 6자회담과 북미관계에 대한 대담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고려호텔 구내식당으로 가다가 우연히 북송 비전향장기수 두 분을 복도에서 만났다. 그들은2000년,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송된 우용각 (78세, 평북 출생) 선생과 김동기 (76세, 함남 출생) 선생이었다.

우 선생은1958년에 체포되어 42년의 긴 옥고를 치렀고, 김 선생은 60년대 초에 검거되어 34년의 옥살이를 했다지만 모두 건강하고 웃음을 잃지 않아선지 60대로 보였다. 작년, 두 송환 장기수 선생과의 대화에서 잊을 수가 없는 기억으로는 출옥 후 짧은 ‘창살 없는 남쪽사회생활과 고향으로 돌아가던 날의 심정’을 묻는 데에 대한 대답이었다. 김 선생은 “권오헌 양심수 후원회장을 비롯한 많은 남쪽 동포들의 따뜻한 손길이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몸으로 통일사업에 매진할 수가 있게 됐지요”라는 대답이었고, 우 선생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나를 얼싸안아 줬을 때 너무도 기뻐서 한없이 울었지요. 눈물로 범벅이 된 조국의 흙을 한줌 집어 냄새를 맡고 맛을 보았지요.라는 대답이었다.

두 분이 김대중 대통령 발언은 한 번 한데 반해, 권오헌 후원회장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번 할 때에 솔직히 나는 권 회장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가능한 빨리 권 회장을 만나야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즉시 권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북에서 만난 송환장기수 두 분의 근황을 알리고, 그들이 권 회장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더라는 이야기도 했다.


(1) 평양에서 북송장기수들과의 재회

지난 2월, 뉴욕필 평양공연을 전후해 2주일이나 평양에 머물면서 작년에 만났던 송환장기수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용각, 김동기 두 선생은 작년보다도 더 건강해지고 양 가슴에는 훈장도 더 늘었다. 이들은 가장 먼저 “길고도 긴 형을 마치고도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는 동지들이 걱정되어 잠을 못 이룹니다. 라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들은 이명박 정부가 “친미 극우, 반북 반통일로 접근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매우 우려가 된다.” 면서, “권오헌 회장이 앞장서서 벌리는 남녘동포들의 출옥장기수 송환운동이 더 어려워질 듯도 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두 귀국장기수들은 남쪽에서 <출옥장기수북송문제>를 <국군포로문제>와 연계시키려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하면서, 출옥장기수들은 이미 모진 형을 치룬 사람이고 또한 북으로 가기를 희망하기에 전적으로 <인도적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문제를 가장 정열적이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 까지도 붉혔다.

쏘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던 90년대 초, 남쪽의 날고긴다는 학자나 정치가들 (미국도 마찬가지) 이 북한의 몰락도 시간문제라고 했을 때에 전향을 생각해 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두 분은 머리를 저었다. 김동기 선생은 “그 시절이 일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는 때”라는 말을 하고는 “전향공작이 가장 악랄하고 또 전향자도 있었지요.라는 말을 했다. 목사와 미국 혹은 영국박사라는 지식인들에 의한 회유공작은 “보라! 공산주의의 종말이야! 세상이 달라졌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고, 가장 저질의 공작을 했다고 한다.

변절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조국을 위해 바친 피와 땀방울이 아까워서…”라는 말을 하고는 잠시 한숨을 쉰 다음 “자식들 보기에 부끄러워서도 못하지요”라고 우 선생은 손을 내저었다.

복역 중 가장 괴로웠던 일과 가장 기뻤던 일이 무엇이었나에 대한 질문에 김동기 선생은 “전향자가 나왔을 때가 가장 괴로웠고, 조국에서 광명성 1호 (인공위성)를 발사했을 때가 가장 기뻤다”라고 대답했다.

복역 중, 정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텐데, 어떤 것을 들 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들은 사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40여명을 처형함으로서 장면 정권이 가장 많이 사상범을 사형시킨 경우라 했고, 가장 혹독하고 악질적인 고문은 박정희 군사통치 시기에 감행됐다고 한다. 따라서 천인공노할 박정권의 만행으로 그동안 잘 몰랐던 <좌익수>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연루시킨 <동백림간첩단사건>이 군사독재의 가장 잔혹한 만행의 일부분이라고 김 선생은 말한다.

우 선생은 노무현 정권이 국가보안법도 폐지하지 못한 무능 정권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우리 민족끼리>의 정신을 지키려한 것은 평가돼야 한다고 훈수를 들었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신념으로 살았으나,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이인모 선생을 보면서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고 한다.

북송 후의 생활과 대우문제는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 선생은 “한 마디로 금방석 위에 앉아 있지요”라 하고는 외아들은 직장에, 손자는 군대에 있는 단란한 가정이라고 자랑을 했다. 대궐 같은 집에서 행복을 누리지만, 항상 두고 온 남쪽의 동지들 생각에 맛있는 음식도 쓰다는 생각이 난다는 말을 한다. 보급은 비행사 이상이고 월급은 중앙당 부장급보다도 높다며 특급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이야기가 깊어지니 김동기 선생은 부인이 <만경대학원>출신이라는 말도 하고 현재는 작가동맹원으로 <삶의 노래>, <생이란 무엇인가>, <태양 가까이>, 등 다수의 저서도 있다면서 서점에 진열 돼 있다는 말도 했다. 김 선생은 “권오헌 회장이야 말로 인권과 결혼한 사람입니다”고 하면서 천주교신부님들, 노재필 (통일광장) 선생, 불교와 신교 종교인들이 장기수들에게 보여준 따뜻한 헌신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이들이 보내준 <영치금>은 장기수들에게 절대적인 도움이 됐다는 말을 힘주어 한다.

워싱턴의 최장길씨와 한 시간 반이나 북송장기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호텔에서 멀지않은 만찬장으로 두 분과 함께 이동하니, 역시 북송장기수들인 고광인, 김선명, 이경천 선생님들이 들이닥쳤다. 여기를 단고기식당 (보신탕전문집)이라 부르는데 중국집처럼 각기 다른 부위로 만든 접시가 계속 나오다가 마지막에 탕이 나왔다. 일행인 최장길씨는 건배사에서 “모질고 긴 악몽의 시련을 강철 같은 의지로 이겨낸 선생님들은 분단의 가장 비참한 희생자 입니다. 민족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흉인 분단을 제거하는 일에 큰 성과를 냅시다.라고 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연회에 동석했던 최순철 참사와 김무성 부처장이 <청혈은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주로 혈압을 내리도록 특수 제작된 은반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북송장기수 부부들에게 선물로 보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와 최씨는 번갈아 가며 반지를 껴보고는 “이것을 우리에게 팔지요?”라고 하자 모두 한바탕 웃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긴 45년형을 마감하고 송환된 김선명 선생 (85세)에게 감옥동지가 사망했을 때의 심정을 물었더니 “가장 가슴 아프고 원통했지요. 우리 동지들은 비통신 (비밀통신)을 통해 일제히 북쪽을 향해 추모를 했지요”라는 답이다. 남쪽에 두고 온 장기수 동지들과는 자주 연락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남쪽 당국에 불필요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고…”라며 중간에서 말을 끊는다.

연회에 참석했던 모든 송환장기수들이 건배를 제의하고는 한결같이 권오헌 회장과 많은 남녘 후원자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말을 했다. 지금 더 어려운 여건이 조성됐지만, 남쪽에 남은 출옥장기수들이 노환으로 죽기 전에 송환 되도록 노력을 계속하자는 말도 했다.

(2) 서울에서 만난 출옥장기수들

<##IMAGE##> 2월 26일, 역사적인 뉴욕필 평양공연장은 1,500석으로 한정된 좌석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큰 영광이자 행운이었다. 동평양대극장 무대 위에 공화국과 미국의 국기가 게양되고 미국 교향악단에 의해 양 국의 애국가가 연주될 때, 평양시민들은 일제히 일어나 예의를 지키며 60년이 넘도록 지속되는 적대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제청 곡으로, 명성을 떨친 북한 작곡가 최성환의 관현악곡 <아리랑>이 연주되면서 평양시민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도 참으려야 참지 못하고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평양 시민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오랜 북미 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자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이고, 나아가 이제는 기어코 번영을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잘살아 보겠다는 강한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이 역사적인 장면을 머리에 간직하고 서울을 향해 떠나고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뉴욕필 단원들을 싣고 온 아시아나 항공기가 순안공항에 정박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남북의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평양을 떠나 서울에 도착했다.

퍙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서울을 돌고 돌아 와서야 아직도 분단 현실의 벽은 높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년부터 편지로 알게 된 권오헌 양심수 후원회장을 만나면 남쪽에 남아있는 출옥 장기수들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하고 <낙성대 만남의 집>을 찾았다.

권 회장과 후원회 일을 도맡아 보는 임미영 선생이 일행인 최장길 선생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출소 장기수 문상봉 (84세, 평북), 김영식 (76세, 강원도) 두 선생이 우리에게 찾아주어 고맙다며 손을 내민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를 돕고 있는 모성용, 소수영, 류금수 선생들도 우리를 만나고자 달려왔다.

우리는 평양에서 송환장기수 선생들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이 남쪽 권오헌후원회장과 후원활동가들에게 보내는 안부와 감사의 뜻도 전달했다. 그러고 나니 나는 정말 <강남 갔던 재비가 봄소식을 전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동이 자유롭지는 못해도 건강하고 깔끔해 보여서 인상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냄새가 나는 문상봉 선생은 1946년 (22살)에 모택동의 팔로군에 입대해서 장개석 군대와 많은 전투를 했으며 49년, 중국인민해방군 김창덕 부사단장이 이끄는 조선인군대를 따라서 조선인민군에 편입됐다고 한다. 군대생활을 계속 하다가, 55년에 제대하여 직장생활을 남포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결혼하여 딸 둘을 낳고 잠시나마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을 누렸다.

62년, 통일사업의 임무를 하다가 체포되어 27년의 옥고를 치루고 88년에 풀려나왔다. 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살인폭력배로 구성된 전담반의 혹독하고 악랄한 고문은, 더구나 무연고자인 장기수들에 대해서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고통이 가해졌다고 한다. 심지어는 뇌 활동을 마비시키는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전향서에 강제 날인 까지 했다고 한다. “이렇게 강요에 의한 날인이 너무도 분해서 열흘을 밤낮으로 울었지요. 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장기수들의 전신을 마비시켜 혼을 빼내고 강제로 날인케한 소위 <전향서>라는 것이 무효이고 사기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자 문상봉, 김동기 두 선생은 출옥장기수들을 규합하여 양심을 고백하고자 <전향무효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만남의 집>에 문상봉 선생과 함께 살고 있는 김영식 선생은 전쟁이 나자 나이가 작다고 거절하는 것을 뿌리치고 자진 인민군에 입대했다. 56년에 제대하고 원산수산사업부에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해서 아들 딸 하나씩 두었다. 그러나 62년, 통일사업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되어 26년의 형을 치루고 88년에서야 옥문을 걸어 나왔다.

73년 광주교도소 재소 시, 좌익수 전향공작이 강화되면서, 온갖 물리적 심리적 고통이 가해졌는데 정말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백정들의 굿판”이 매일 벌어졌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잔인무도한 살인고문과 인간의 넋을 빼고 강제로 서명한 <전향서>가 만들어지고도 김 선생은 15년을 더 감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 그는 일일노동자로, 목수로, 채석꾼으로, 막일이면 무엇이든 했다. “김기호 동지와 신춘복 동지가 강제 전향공작에 항거해 자살을 했고, 변치수 동지는 고문으로 죽었지요.라며 이것은 자기가 직접 목격한 끔찍스러운 비극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뒤늦게 양희철 (74세, 전북) 선생이 찾아왔다. 그의 첫 인상이 대나무 같다는 생각과는 정 반대로 그의 말씨와 이야기풍은 매우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전라도 시골에서 고학으로 국가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고려대학 (56년에)에 들어갔다. 고대를 기반으로 서울대, 동국대, 외대, 경희대, 중앙대 학생들과 평화통일운동을 하던 중, 서울문리대 불문과 학생의 밀고로 대학생 27명과 함께 <고대지하당사건>이라는 이름으로 62년에 체포된다. 이후 <양희철 간첩단사건>이라는 이름으로37년의 장구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송환장기수 중, 8명이 같이 있다가 조국으로 돌아갔고, 또 아픈 분들을 떠나보내니 제일 가슴 아팠지요" 라는 양 선생이 실로 남쪽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 전향공작반은 고향이 북도 아니고 남쪽 놈이 더 지랄한다.”는 말을 하면서 더 악독한 고통을 자기에게 가했다고 한다. 1차 장기수 북송에 가족 동반은 북송불가라는 원칙을 적용하는 바람에 남쪽에 가족을 갖고 있는 양 선생에겐 보통 실망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직도 <보안관찰법>이 적용되고 있으며 수시로 자기를 당국에서 점검을 한다고 한다.

양 선생은 “노무현 정부는 좌측 깜박이를 켜놓고 우측행을 했다”고 논평을 하면서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한, 미, 일 네오콘과 죽이 맞아서 신공안정국으로 회귀 할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지적한다.

양 선생은 옥중에서 연마한 한의학이 인정을 받게 되자 천주교의 헌신적 노력과 지원으로 서울에 <우리탕제원>이 마련됐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환자의 진단과 처방에서 마지막 포장에 이르는 일들이 안학섭 선생을 위시해서 여러 감옥 동지들에 의해 공동분담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새 정권의 <실용주의>논리는 민족문제를 어떻게 푼다는 예기냐는 질문에 대해, 양 선생은 “민족도 버릴 수 있다는 무서운 논리지요”라는 답을 하고서 “한,미,일 3각 신동맹으로 극우보수의 진보세력에 대한 조직적 파괴가 예상되어 걱정입니다”라고 덧붙여 말을 한다.

현 정부의 <비핵, 개방, 3천>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 권오헌 양심수 후원회장은 “한 마다로 모독이지요.”라고 잘라 말한다. 출옥 장기수들 본인이 북으로 가길 원하는데 왜 못 가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권 회장은 “남쪽에서 <국군 포로 문제>와 교환 조건을 내 걸기 때문이지요.”라면서 출옥 장기수 문제는 어떤 것과도 거래 대상이 될 수가 없다고 조리 있게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조속히, 아무 조건 없이 이들이 송환돼야한다”고 역설한다.

작년 12월, 26개 시민 사회단체가 <비전향장기수 송환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송환 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나 남북 관계가 경색되는 것을 보니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다는 권 회장의 두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게 타오르는 듯 했다.

(3) 인권과 결혼 한 권오헌 선생

<##IMAGE##> 권오헌 <민가협양심수후원회장>은 자그마한 체구에 소박한 시골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었다. 겨우 50을 갓 넘었으리라는 짐작으로, 나 보다 훨씬 젊으니 격식을 갖춘 예의는 안 해도 되니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 회장이 쓴, 고희 (70) 기념 책자 2권을 받아들고서야 깜짝 놀라서 그동안 실수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 회장은 홍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촌사회운동을 하다가 군사통치 반대 운동에 뛰어든 것이 민족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씨름을 하게 된 계기다. 1979년, 소위 <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 반을 복역한 후로는 아예 결혼도 마다하고 반전평화, 인권, 통일운동을 천직으로 택한 분이다. 평양에서 만난 송환장기수 김동기 선생이 “권 회장은 인권과 결혼했다”는 말을 왜 했나를 서울에 와서야 알게 됐다.

인권, 양심수, 반전평화, 민주, 통일운동의 발자취에는 언제나 권 회장의 발자국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그 중에서도 장기수들을 정성으로 보살피다가 그들을 북녘 땅으로 돌려보낸 일은 역사에 길이 아로새겨질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인모 노인에 이어서 1차 송환자 65명의 명단에서 <비전향자가 아님>이라는 이유로 정순택, 정순덕 두 노인이 제외됐고, <가족동반불가>라는 조항 때문에 생이별이 강요되어 또 하나의 이산가족을 만든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그는 말한다.

강요에 의한 <전향서>를 빌미로 송환 거부된 장기수들의 출옥 후 고통은 감옥살이의 연장인 것이다. 이들 중 많은 장기수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연로한 상태에 있다. 내가 낙성대 <만남의 집>에서 만난 문상봉, 김영식 두 선생은 강제 전향이 무효라며 <양심선언> 까지 했음에도 북녘의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고, 양희철 선생은 가족 동반 북행 불가라는 조항에 걸려 마지막 남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전향딱지의 구실로 송환되지 못한 장기수로는 전순덕 할머니가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일찍50년대에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63년에 체포된 최후의 여성 빨치산으로 세상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 쪽 발이 잘리고도 의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강철 같은 여인. 이 할머니는 슬하에 4남매를 두고 2004년, 세상을 떠났으니, 살아서 38선을 넘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 저주의 38선을 넘어갔다. 일편단심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회생한 전순덕 여성 빨치산 할머니에게 북녘에서는 공화국영웅칭호가 수여됐고, 지금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말없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평양에서 만난 송환장기수들의 목소리도 한결같이 남녘에 두고온 출옥동지들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한다고 입을 모았고, 평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자들과의 대화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해외 지식인들을 주로 맞이하는 정기풍 사범대학교수에 의하면 “남쪽에서 <출옥장기수문제>를 <국군포로문제>와 굳이 연계시킨다면 북쪽에서는 <원자탄투하소동>으로 떠밀려 간 수 백만의 북의 동포들과 <반공포로>라는 이름의 <인민군포로> 북행저지를 문제로 삼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권오헌 회장은 ”< 출옥장기수송환문제>는 절대로 흥정거리가 아니며 조건 없이 송환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문제가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정 반대로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산물이기에, 장기수송환도 분단제거 운동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권 회장은 오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장기수들의 송환이야 말로 “분단 상처의 응어리를 풀고 민족의 화합과 번영, 나아가 통일을 위해서도 반드시 선행돼야 합니다.”라고 역설한다.

문상봉, 김영식, 양희철 출옥장기수 선생들과 권오헌 후원회장, 그리고 후원회의 궂은일을 맡아보는 임미영 선생을 비롯한 여러 후원회 임원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대문을 나서니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바로 들 수가 없었다. 한편, 이런 민족의 비극이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미주에서는 너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옥살이로 병마에 시달리며, 노구의 몸을 이끌고 해어진 가족과 고향을 그리면서 북녘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출옥장기수들의 실상이 미주에도 널리 알려지면 얼마나 좋으랴. 그래야만 재미동포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의 지지와 지원도 필연 따르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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