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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미주]윤영무 선생, 83년 회고</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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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minjok.c… 작성일03-12-09 00:00 조회1,7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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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본 한국전쟁(원문 제목은 판문점 담판:1991년 6월15일 한백사 출판)」이란 차이쩡원과 짜융b 공저의 중국도서를 번역해 발행하고 일본어로 된 김명철 저서의 「김정일의 통일전략」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살림터에서 2000년 5월20일 펴냄)한 미주 민족민주운동 진영의 원로 윤영무 선생은 지나 간 83년을 회고하며 오늘의 역사를 조명해 준다.

yoonyoungmu-3.jpg"처음 책은 차이쩡원이 주로 집필한 저서인데 그는 조선전쟁을 담판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이북과 미국, 그리고 중국 등 대표들이 전쟁종식을 위해 담판할 때 직접 참가했던 당시의 중국관리였는데 미국과의 담판이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금새 이 말하고 조금 있다가 거짓말하는 미국대표들과의 회담에 관해 기술한 책"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귀중한 사료를 번역하기 위해 1984년부터 번역 출판되던 1991년 사이에 베이징에 소재한 베이징문화대학(언어전문학교)에 등록해 공부하면서 번역을 마친 도서라고 말한다.

"두 번째 책은 처음 김명철 박사가 일어로 출판한 것을 2000년 봄 보름동안 쉬지 않고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국의 살림터에서 출판해 베스트 셀러까지 되었다가 국가보안법 관계로 판금 되었던 책인데 이 책에 담긴 북한정보들은 그 어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내용들로 귀중한 자료인데 왜 판금 했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한 윤 선생은 "일본의 보수 층 식자들이나 미국의 보수 층과 클린턴 전 대통령, 크리스토퍼 전 국무장관 등 군사전문가들도 읽고 감동한 자료들인데 유독 한국공안기관에서 이것을 국가보안법에 걸어 판금 시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술회한다.

yoonyoungmu-5.jpg자주민주통일미주연합 고문으로 그리고 통일학교 고문으로 활약해 온 윤영무 선생, 그는 누구인가. 워낙 성품이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조용한 분이고 언론인들과 대담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꺼려하기 때문에 기자가 윤 선생과 대담을 하는 데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는 1920년 7월18일 평양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인민학교, 중학교,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43년 1월 일본으로 유학 길을 떠나 도꾜에 가서 중앙대학에 등록은 하였으나 공부는 제쳐두고 옆집의 일본인 진보운동가를 만나 잠시 한 서클에 참여하다가 1년도 못되어 그해 12월경 귀국했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오자 말자 일본헌병에 붙잡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갔다가 얼마 안되어 8.15를 맞게되었다. 30살 되던 1950년 8월 숙대 가정과를 졸업한 김일량 여사와 피난시기에 결혼하여 2남1녀를 두고 있다. 결혼 후에는 풍안무역 이사로 일하다가 1970년 브라질 쌍파울로에 이민가서 세탁공장을 운영했고 1975년에 미국으로 이민 와서 뉴욕에서 오랜 동안 의류상 도산매를 경영하다가 연로하여 은퇴하고 최근에 로스엔젤레스로 거주지를 옮겼다. 윤 선생은 80연대 초반부터 미주민족민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을 후원하며 말년을 보내오면서 7순이 넘은 나이에 중국어를 공부하여 민족자료에 도움이 되는 중국어와 일본어 도서들을 번역하여 해 내외 민족민주운동진영에 기여해 왔다.

그는 최근 3년 동안에는 서예공부에도 몰두했다. 그의 서재가 있는 방에는 붓글씨 도구와 그가 쓴 서예작품들이 수십 여 개 싸여있다. 자주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고 쓴 서예작품도 보이고 중국 조조가 쓴 글들을 붓글씨로 쓴 작품들도 눈에 띈다. 그는 지난 9월에는 미주한인서예협회가 개최한 작품전에도 서예작품을 출품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yoonyoungmu-1.jpg그는 일본헌병에 의해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군 부대에서 죽을 고비를 무릎쓰고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가 활동하였지만 광복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광복군 활동을 물으면 "별로 한 것이 없는데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면서 총 들고 한번도 싸워보지 못한 광복군인데 얘기할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양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 학자들과 해외학자들을 초청하여 개최하는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세미나가 있었는데 그곳에 가서 들어보니 사실과 거리가 멀었어요"라고 말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은 광복군에서 한 건 별로 없고 거의가 김일성 항일유격대에서 벌인 전투였다고 설명하면서 「보천보 전투」소식을 들었을 때 임시정부 간부들을 비롯하여 김구 선생까지도 통쾌해 했다고 격찬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당시 광복군은 장개석의 중앙군 산하에 편재되어 있었는데 중앙군은 광복군에게 무기를 주지 않고 중앙군 내부에 머물러 있으라고만 주장하였다고 한다. 장개석군은 일제와 맞서 싸우는 생각보다는 마우태퉁(모택동) 지휘아래 움직이는 팔로군과의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마치 임시정부 간부들이 일제와 싸우기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는 간부들 사이에 감투싸움에 연연하는 양상들과 흡사한 상태였던 것으로 그는 회고했다. 청년 장준하가 임정간부들의 주도권싸움들을 관찰하면서 통탄한 나머지 이러한 현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등대"라는 잡지를 만든 이야기와 맥을 같이한다.[장준하 돌베게 참조]

yoonyoungmu-4.jpg이러한 와중에 8.15를 맞았다. 김구 선생은 해방을 맞아 귀국을 준비하였으나 미군에 의해 좌절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이름을 가지고는 귀국하지 못한다는 것이 미군당국의 강력한 요청이었다고 한다. 한편 김구 선생은 당시 상해에 와서 그곳 동포들을 불러모아 해방의 기쁨에 대해 연설하며 "친일파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외쳤지만 그곳에 참석한 중국거주 동포참석자들은 거의가 친일파였고 아니면 아편장사꾼들 등 이였기 때문에 이들 교민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었다고 윤 선생은 안타까워했다. 그는 특히 "김구 선생이 그후에도 정세를 잘못 읽어 이승만과 손잡고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것은 최대실수였다"고 혀를 차기도 했다.

윤 선생은 또 장개석의 입장과 자세를 이승만과 유사하다는 점을 비유하기도 했다. 장개석이 쓸만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듯이 미 지배세력의 비호아래 구성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은 애국자들이었던 여운형, 김구, 장준하 등을 죽인 정권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의 팔로군과 중앙군의 알력을 우리 역사에 대입하여 조명하면서 여기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앙군을 지휘했던 장개석은 이념이 달랐지만 모택동의 팔로군과 힘을 합쳐 외세인 일제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하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이루었어야 하는데 동족끼리 주도권 싸움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자기 휘하의 사령관이었던 장한량이에게 서안에서 감금당해 "국공 합작하여 항일투쟁을 하려는가, 아닌가"에 대해 응답해야만 하였던 난처한 사건, 즉 서안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la1028rally-3.jpg[사진은 윤영무 선생(오른쪽)이 지난 10월28일 로스엔젤레스 총영사관 앞에서 진행된 "한국군 전투병 파병반대"시위에 참석해 활동하시는 모습.

그는 중국의 두 세력에 대해 당시의 중국 내 사정은 모택동군과 장개석군의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었다고 회고한다. "모택동군은 겉보기에는 비록 거지같이 보이고 누추하였지만 모택동군은 도덕적으로 깨끗하였고 그 당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일관하였으나 장개석군은 일제에 항쟁하는 투쟁정신이 미약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다"고 설명한다. 남경에 배가 들어오면 장개석군의 군벌 도둑질에 의해 들어오자 말자 빈배가 되어버릴 정도로 부패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제가 항복한 1945년 이후부터 1949년까지 4년에 걸쳐 모택동군과 장개석군의 내전이 벌어졌으나 이 전쟁이 끝나자 장개석군의 사단장들이 모택동군에 합류했고 중국의 본토는 모택동군의 수하에 장악되게되었다고 한다.

윤영무 선생은 우리의 과거 역사나 다른 나라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오늘의 역사현실에 과거사들을 조명하여 참신한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으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중국의 국공합작의 노력을 설명하면서도 분단된 우리 나라가 좌우의 이념대결을 지양하고 한반도 역사를 차단하여 온 외세를 극복하여 양 체제가 서로 존중하는 기초 위에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가슴 속 깊이 담겨있는 깊은 뜻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83년을 돌아보며 이러한 뜻을 후진들에게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중국말을 배워가면서 까지 <판문점 담판>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그리고 일본말로 된 <김정일 통일전략>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도 모두 이러한 귀중한 뜻이 담긴 생애의 한 부분으로 느껴진다.

[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12/01/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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