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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후 드골이 프랑스에 돌아와 수많은 언론일들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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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2-18 16:35 조회1,54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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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17:45 (14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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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외국인에게 점령될 수 있어도 내국인에게는 더이상 점령 당하는 일은 없을 것 이다" - 샤를르 드골 -

2차 대전 후 드골이 프랑스에 돌아와 수많은 언론인을 처형했다.그들은 처형당하며 항변했다.

“난 아무 일도 안했다”
“바로 그것이 죄다”

프랑스에서 15만 여명의 프랑스인 인질이 나치에 의해 총살당했고 75만 여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독일 군수공장으로 강제로 끌려갔으며, 11만여명의 프랑스인이 정치적 이유로 나치 집단수용소에
갇히고, 12만여명은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나치 수용소에 이송됐다.

피고는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조국에 귀환했는지 아는가?
예, 1500여명만이 돌아올수 있었읍니다.

-프랑스를 역사상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간 반역자 패탱의 재판에서 검사의 말-
  " 인간은 그가 누린 특권의 책임을 반드시 지게 해야 한다."

-대기업 총수의 도덕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카뮈의 말-
*나치독일과 흥정해 얼마나 많은 돈을 불법적으로 벌었고 부당이익을 취했냐에 관한 재정문제보다,
출판한 단행본이 얼마나 애국적이며 얼마나 나치 독일에 협력하고 봉사했는가등을 기준으로, 숙청
대상 출판사를 찾아내기로 결정했다.

"민족 반역행위를 법적으로 밝혀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멘트나 가죽을
적에게 팔아 단순히 돈버는 것보다 장/단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숙청위원회가 출판계의 숙청 방향을 바로 잡으면서-
언론인들과 작가들이 침묵했다는 것이 왜 처형의 이유가 되는가?
ㅡ언론인 / 문인은 사회 공인이자 계몽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944년 해방이 되자마자 맨 먼저 민족반역자의 처리부터 서둘렀다. 그 일이야말로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의식'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50여년 간을 그들은 일관
되게 당시의 민족반역자들을 찾아내 처벌하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처벌할수 있었던 근거는 1964년
12월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전쟁범죄에 대한 시효를 없애는 규정한 법률'이라는
소급입법에 의한 것이다. 해방 후 20년이라는 세월로도 모자라 아예 시효를 없애버린 거다.
그렇게 처형(사형)당한 반민족 행위자 수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만 무려11,200명 (그러나 이 숫자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처형된 숫자이며 비공식 집계로는 즉결처분이나 약식 재판을 통해 처형된 사람이
무려 12만명에 이른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약 1만 명에게는 강제노역, 약 3천 명에게는 중노동 무기형, 약 4만명에게는 공민권 박탈을 각각
선고했다. 특히 언론에 대한 조처는 더욱 엄격했는데,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4년 동안 15일 이상 펴낸
신문은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 폐간조처를 하고 신문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언론에 대해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한것은 이들이 신문을 통하여 독일의 정책 수행을 돕고, 국민 여론을 오도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십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언론을
개인의 부역과 같이 다룰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처벌을 면한 신문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지
등 3개 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점령기간 중 자진 휴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킨 신문들이다.)

언론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언론인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했는데, 가장 가벼운 처벌이 다시는 언론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는 공민권 박탈이었으며 독일에 협력한 많은 언론인들이 처형을 당했다.어제의 범죄
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 레 레트르 프랑세즈(주간지 프랑스문학)

국가가 애국자들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에게는 벌을 줘야만 비로소 국민은 단결할 수 있다. - 드골 -

나치에 협력한 민족반역자에 대한 재판은 특히 파리재판소가 거물급 인사들을 거의 다루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뿐만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파리에 집중됐다. 드골의 과거청산 작업은 히틀러가
항복하기 전에 이미 시작됐기 때문에 나치전범을 심판한 뉘른베르그의 국제재판보다 시기적으로
2년 정도 앞서 열렸다.

드골이 주도하는 나치 협력자 숙청은 민족을 배반한 무리들을 모조리 지배층에서 뿌리뽑았고,
악질적이며 광적인 나치협력자들을 사형과 무기/ 강제노동형에 처함으로써, 다시는 지배자로
군림할 수 없도록 영원히 매장해 버리는 데 성공한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파리의 숙청 재판정에 가장 먼저 끌려나온 피고들은 널리 알려진 나치 협력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전쟁 전에 독일에 편든 언론인으로 낙인찍힌 부류이고 파시즘을 찬양하며,
나치즘을 확고한 자기신념으로 갖고 나치가 승승장구할 때 자연스럽게 선전을 담당해 미친
듯이 설친 놈들이다. 그런데 전쟁 전에 기회주의적으로 반 나치였다가 독일이 점령군이라는
강자로 등장하자,나치독일의 선전원으로 된 ‘ 갈보 언론인’은 매우 가혹하게 다루었다.

드골이 언론인을 맨먼저 민족반역자의 법정에 올린 것도 숙청 전략의 한고리다. 드골 자신이
언론인을 맨먼저 심판하는까닭에 대해 나중에 솔직히 술회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언론인은
도덕의 상징이기 때문에 첫 심판대에 올려 가차없이 처단했다.”고 적었다.

부역죄는 모든 재판에 반드시 병과되었는데, 이 죄는 선거권 / 피선거권과 함께 공직 임용권을
박탈하며, 공무원, 군, 변호사,회계사, 교원, 노동조합원, 언론인과 모든 통신과 정보 업무에서
쫓아내고, 심지어는 개인기업의 사장은 물론이고 이사진에서도 빠진다.특히 부역죄는 국적을
뺏는 형벌이 자동적으로 병과된다고 규정해 드골이 나치 협력 반역자에 대한 심판을 통해
프랑스 사회를 완전히 깨끗이해 순수한 국민으로 새로 짜려한 정치적 소신을 실현한 것으로
주목하는 대목이다.

대숙청 후 프랑스 사회가 빠르게 민주화되고 도덕성과 윤리 그리고 민주적 법질서가 잡힌 것은
나치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을 모두 걸러내 부역자들까지도 응징한 결과라고 평가한다. 드골은
파리 해방 직후 파리 재판소에서 나치에 협력한 언론인을 맨먼저 민족반역자의 심판대에 올림
으로써 반역자 숙청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간단하게 잠재웠다.

프랑스 대숙청을 처음 학문적으로 연구한 로베르 아롱은 44~45년 나치협력 혐의로 의심받거나
처벌된 사람이 50만명, 구속된 사람이 15만명, 사형선고 받은 자는 3만~4만명이라고 추산했다.
그 가족들까지 감안하면 200만~300만명, 즉 총인구의 3~5%가 나치에 협력한 죄값으로 국가와
사회에서 쫓겨난 것이다.‘프랑스의 숙청’에서,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게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은 어리석은 짓이다.

ㅡ그러나 대한민국은 36년간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를 당하고도 한 명도 처형당하지 않았다ㅡ  (- 정용운 -)






194종 한민족, 고대 아시아민족은 배달조선족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62)-단군조선(檀君朝鮮)과 고대역사(31)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 기사입력 2015-01-31 21:50:11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고대 숙신국(肅愼氏)의 역사도 바로 잡고가야(2)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우리 한민족의 호칭은 194가지나 된다고 했다. 고대 아시아민족들은 거의가 우리
배달조선민족의 후손인 한민족들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터키에 사는 돌궐족은 원래 투르크족이고 선비족의
후손들이다. 터키는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 까닭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고대
시대 가을추수 후 자리를 같이하며 춤을 추고 노래하고 음식을 나눠먹었던 형제들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거짓꾸민 역사 없이 고대역사를 올바르게 배웠다. 이에 터키인들은 고대 우리와 같이 어울린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보면 먼저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수많은 부족국가를 이뤄 대륙에 흩어져 살아 호칭이 다양하다. 그러나 중국사서의 조선 관련
기록은 조작,거짓꾸미기, 변조가 너무 심하다. 우리는 잘못 된 사서를 보고 너무 무지하다. 중국문헌은 믿을
것이 못 되는 연구이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기록도 모두 없애 우리나라는 아예 숙신씨
(肅愼氏)에 대한 역사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역사에는 숙신국에 대한 항목조차 찾기 힘들다.다 알다
시피 환국(桓國)시대에는 우리한민족의 나라만도 12~16분국(分國)이 있었다. 비리국(卑離國), 양운국
(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필나국(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卑國), 탁위국(涿韋國), 통고사국(通古斯國), 수밀이국(須密爾國) 들이 모두 우리 한민족이다.
 
또한 배달국에서 고조선 이후에는 조선, 숙신(肅愼), 직신(稷愼), 발숙신(發肅愼), 발조선(發朝鮮), 번한
(番韓), 진한(眞韓), 마한(馬韓), 삼한(三韓), 주신(珠申), 구환(한)족(舊桓(韓)族), 구려족(九黎族), 삼묘
(三苗), 구이(九夷), 대진국(大震國), 번조선(番朝鮮), 말조선(馬朝鮮), 진조선(辰朝鮮), 동이(東夷), 예(濊),
맥(貊), 학(狢), 부여(夫餘), 동북이(東北夷), 고구려, 신라, 백제, 후고구려, 고려, 발해, 조선, 대한(大韓)
등으로 이어져 왔다. 우리 한민족의 호칭은 이처럼 수백 가지에 이른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역사자료가
없기에 역사서에도 없는 것이 되고 있다.
이번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숙신국(肅愼國)의 역사를 더 살펴보고자 한다.
 
문화계(文化系)의 동이족과 야만계(野蠻系)의 동이족
 
우리 한민족은 환국, 배달국, 고조선의 역사를 통해 오랫동안 강대한 국가를 이뤘다. 이들 역사를 일군
동이족을 좀 더 구분하면 문화계(文化系)의 동이족과 야만계(野蠻系)의 동이족으로 나뉜다. 문화계(文化系)
의 동이족으로는 숙신씨(肅愼氏), 고죽국(孤竹國), 부여(夫餘), 고구려가 있다. 회남자(淮南子)에 ‘숙신씨
(肅愼氏)는 존경할 민족이요 특이한 민족’이라고 했다. 이는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숙신씨(肅愼氏)는 4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수서(隨書, 卷六十七,列傳第三十二 表矩)
에는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고죽국(孤竹國)은 문화가 고도로 발전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같은 군자(君子)가 있었다. 고죽국(孤竹國)은 3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
했는데,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다.
 
또 삼국지 동이전에 부여는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배작(拜爵), 세작(洗爵), 읍양(揖讓)의 예의가 있다고 했다.
이는 부여의 문화가 고도로 발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같이 부여(夫餘)는 2000여 년 전에 문화국을
건설했다. 부여는 고죽국의 문화를 잇고 고죽국(孤竹國)이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를 이은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 함은 고구려가 결국 숙신씨(肅愼氏)의 문화를 이었다고 하겠다. 숙신
(肅愼)은 마소(牛馬)을 사랑했는데, 고구려 역시 마소를 사랑했다. 그래서 고구려 사람들은 마소(牛馬)를
죽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가 숙신(肅愼)의 문화를 이은 것을 말한다. 또한 수경주석(水經注釋(卷十四濡水)
에는 ‘진시왕(秦始王) 22년 연(燕)을 분할하여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니 영지(令支)가 예속됐다. 영지
(令支)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 했다. 요사(遼史)에 평주(平州)는 은(殷)나라시대에 고죽국(孤竹國),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산융국(山戎國)이라 불렀다. 진(秦)나라시대에 요서(遼西), 우북평이군(右北平二郡)
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백제가 고죽국(孤竹國)을 직접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찰하면 우리 한민족은 문화계로서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이은 것을 알 수 있다.
 
야만계(野蠻系)로 분류되는 동이족으로는 읍루(挹婁)를 비롯한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
(室韋) 등이 있다.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들은 배를 타고 타민족을 침략하고 추월
(秋月)에 독약, 전시(傳矢)를 만들어 짐승을 잡는 것을 생업으로 했다. 아울러 오줌으로 얼굴을 씻는 더러운
생활을 했다(東夷考略(第一卷 一面 參照)고 전해진다. 요컨대 동이족 중 문화계(文化系)와 야만계(野蠻系)
를 구별하면 우리 한민족이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이은 것이 자명해진다. 반대로 읍루(挹婁)를 비롯한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 등은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잇지 못한 것이 또한 보다
분명해진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군신화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를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신화는 실생활을
근거로 나온 것인데, 단군신화가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과 완전히 맞다. 단군(檀君)이라는 명칭은 단궁
(檀弓)을 잘 쓰는 무사라는 뜻인데, 전기 진서(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단궁(檀弓)을 사용했다고 했다.
또 단군신화(檀君神話)에 한민족이 태백산(太白山=백두산)에서 출발했다고 했다. 그런데 산해경 별문
(山海經 別文)에 숙신씨(肅愼氏)가 백두산에 살았다고 하고, 또 진서각주(晉書斠注)에도 숙신씨(肅愼氏)가
백두산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단군신화(檀君神話)에 4300년 전에 개국했다는 기록도 있다. 죽서기년
(竹書紀年(卷上)에는 숙신씨(肅愼氏)가 순(舜)25년(4300년 전)에 만 여리에 동떨어진 중국에 화살(弓矢)을
수출했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숙신국(肅愼國)이 대국(大國)임을 가리킨 것이며 단군신화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군조선 건국신화와 숙신씨(肅愼氏)의 역사 묘사가 같다
 
진서각주(晉書斠注)에 4300년 전 대국을 건설했다 함은 숙신씨(肅愼氏)가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한 것이
단군이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했다는 신화로 표현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단군이 산신(山神)이
됐다 함은 산악(山岳)을 존중하는 사상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전기진서(前記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동북산에서 석족(石鏃)을 채취할 때에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한다고 했다. 산에서 생산되는 석족(石鏃)
을 위해 기도하는 신(神)은 수신(水神), 화신(火神), 일신(日(神)), 천신(天神)이 아니고 산신(山神)이다.
또 단군신화에 호랑이와 곰이 한 굴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짐승도 평화를 사랑해 싸우지 아니하고 한 굴에
사는 도덕이 있다는 뜻이다. 짐승을 존중한 것이다. 실제로 전기진서(前記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말(馬)
이 있으나 타지 않고 마소(牛馬)가 3년 동안 서남을 향해 졸고 있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단군신화에 형(刑)을 주(主)한다고 했다. 그런데 전기진서(前記晉書)에 숙신씨(肅愼氏)가 도둑을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第一, 上)에 단군시대에 편발(編髮)을 했다고 했다. 여기서 단군신화
와 숙신씨(肅愼氏) 신화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는 홍익인간의 이념인 평화의 세계다. 인류사상 상고
부족시대는 평화가 없는 불(不) 평화시대다. 그것은 많은 부족이 사방에 분립하고 불합리한 감정으로 상대
하며 부족투쟁이 심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대는 맹수와 독사를 방위할 의학이나 무기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맹수·독사의 화(禍)가 참혹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또한 상고시대는 기후가 안정되지 못함으로 장마가 장기간 계속돼 큰물이 산야를 휩쓸었다. 당시는 홍수를
방위할 기술이 발달되지 못해 큰물의 해(害)가 심했다. 때문에 타민족의 신화는 부족투쟁, 맹수, 독사의 화
(禍)가 해(害)로 장식한 불평화의 시대다. 그런데 단군과 숙신씨(肅愼氏)의 신화에는 불 평화세계에 관한
문구가 전혀 없고 도리어 신이 인간되기를 원해 신인(神人)이 화합하고 곰과 호랑이가 싸우지 않으며 한 굴에
동거해 짐승끼리도 화합해 살았다고 전해진다. 곰이 사람 되기를 원하여 곰과 사람이 화합했다는 전설도
그 하나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세력을 이루는 우리 조상들이 곰 토템족속과 결혼해 출생한 지도자
가 나타난 4300여 년 전인 환국과 신시시대에 이어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아사달에 나라를 열었다는 것으로
전한다. 이 지도자가 단군임금이고, 그가 세운 나라가 후일 한자화(漢字化) 해 조선(朝鮮)이라 한 것이다.
이 단군조선을 고조선(옛조선)이라고 한 명칭은 신라(新羅) 이후에 쓰여지기 시작했다. ‘삼국유사’에 “위서
(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開創)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다”고 했다.
 
단군임금은 ‘홍익인간’을 제창해 인간을 사랑하고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주장하며 세계를 침략하지 않고
교화한다고 했다. 이는 인류역사상 독특한 신화다. 고조선의 개국 시기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帝王韻紀)
들에 고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적혀 있다.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때 사관인 벡문보(白文寶)가
 “우리 동방이 단군으로부터 3600년이 지났다”고 처음 단군기원(檀君紀元)을 썼다. 서력기원보다 2333년
앞선 단군기원은 요(堯)임금의 즉위년인 무진년(戊辰年)을 단군건국연도로 했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당시
의 법령으로 공포됐다. 이처럼 역사적 신화는 실생활을 배경으로 나온 것인데, 동이족 가운데 평화적 실생
활을 가진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선문화(先行文化)로 요동에도 먼저 산(先住) 한민족
 
중국인들은 우리 조상들을 인방(人方), 동인(東人), 혹은 동이에 속하는 종족이라고 하고 숙신국(肅愼國)
혹은 예맥 족(濊貊 族)이라고 일컬었다. 그들이 활을 다루는데 능했음은 맥궁(貊弓), 단궁(檀弓)이라는
기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큰 활을 사용하는 글자 이(夷)로 보아도 알 수 있다. 활은 오랫동안 우리 조선
족의 무기여서 중국은 당대의 당태종도 신라의 활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한 사례가 있다. 어떤 종족
이 언제 어디로부터 왔는지 현재 학설은 여러가지로 나누어지고 있어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조상족인 한민족이 치수법(治水 法)과 무기개발을 먼저 하고 앞선문화(先行文化)를 지니고 중국
한족(漢族)에 앞서 중국대륙과 요동에 먼저 살았다는 사실이다. 중국은 우리 나라와 한민족(韓民族)
역사를 지금도 동북공정을 통해 자기들의 역사로 변조하며 우리 한민족을 자기들의 울타리 안에 넣으려
고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한족과는 그 어계(語系)부터 다룰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종족이다.
 
우리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문화 시작이 중국의 황하유역보다 수백 년 앞선다는 점과 요하문명이 황하
문명보다 2000년 이상 앞선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황하문명도 우리 한민족이 일으킨 문명인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미국의 동양 미술학자 존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은 ‘조선 한족
(韓族)이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일찍 중국에 정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문화가 일찍부터 중국과 다르다는 것을 바로 보고 단군의 존재를 인정 했다.
“한민족(韓民族) 그 문화가 중국 것이 아니고 독특하다. 단군은 단군이다”고 한 코벨의 지적은 옳다.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단군조선이 맨먼저 개척한 곳은 지금의 할빈을 중심으로 한 송화강 연안, 요동평야다.
이들 지역을 고조선 건국 중심지로 보고 있다. 송화(松花)는 고대에는 소밀, 속말, 소머리 등 우수(牛首),
우두(牛頭)라고 했다. 흰 소(白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祭天)지낸 데서 비롯했다.
 
소머리라는 땅이름은 훗날 민족이동과 함께 강원도 춘천, 경주 그리고 일본 각처로 전래된다. 우리 한민족
은 환국시대, 신시 배달국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종족들 간에 곰 상징의 종족과는 융화해 통혼하고, 범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 등은 정벌했다. 곰 족과 태양조상을 받드는 환웅종족이 우세해 다른 종족들을 물리치고
무력통일을 이룬 것이다. 환국-신시시대는 여러 부족이 한민족(韓民族)으로 통일되기까지 서로 싸운 기간이
천 수백 년간 계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 배달국의 제14대 자오지 천황이라는 치우천황(蚩尤天黃)은 헌원과
 73회나 싸워이긴 기록으로 유명하다.
 
우리 한민족은 고대에 강력한 제국을 이룬 민족이다. 한민족은 실로 타민족을 놀라게 할 역사를 창조한
민족이다. 처음으로 문화민족으로 발전하고 처음으로 강대 족으로 등장한 한민족은 인류를 지도하려는 한
(大)사상을 제창했다. 이는 바로 ‘홍익인간’인데, 박애주의로서 인류평화를 실현하려는 이념이다. 지금도
이 이념은 변치 않고 있다. 우리 민족의 한사상인 천민사상, 인간사상, 중물사상의 중핵(中核)은 ‘홍익인간’이다.
이 이념은 숙신국(肅愼國) 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고유한 문화사상을 회복하는
중흥운동의 현실과업 또한 민족갱생이면서 동시에 인류평화다.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간을 부르짖고
그 정신문화의 샘터로 동방을 주목하고 있다. 동방은 바로 우리나라 그리고 한민족이다. 오늘의 인류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발견한 우리 한국과 한민족에게서 ‘홍익인간’의 한사상을 실현하는 중흥운동을 펼쳐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우리가 그 중흥운동의 중심에 서 있기에 당연한 것이다.
 
<이 글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주해 ‘환단고기’. 한창건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咸秉春 ‘韓國의 文化傳統과 法-葛藤과 調和-’,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金正柱 ‘畿內の緣故遺蹟’,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
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 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
現代へ’, 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읍니다>



1910년 2월14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께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을

쏘아죽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은 날입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의 마지막 유언-)


안중근(安重根, 1879. 9. 2~1910. 3. 26)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유학자 안향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안인수는 진해현감, 아버지 안태훈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이다.

특히 아버지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의사는 바로 이 안진사와

그 부인 조(趙)씨 사이에 태어난 3남 1녀 가운데 큰아들이었다. 의사의 아버지는 근대적 신문물의

수용의 필요성을 인식한 개방적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4년 박영효등 개화세력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개혁 정책의 실행을 위해 도일 유학생을 선발할 때 그에 뽑히기도 하였던 인물이었다.



1908년 6월 안중근 의사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이 작전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면서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함경도 일대에서 맹활약하고 있던 홍범도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제2차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일대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의사의 의병부대는 제1차 진공작전과 마찬가지로 기습 공격을 통해 일본군을 여러 차례 깨부쉈다.



아울러 전투 중에 1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의사는 이들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국제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의사는 의병부대원들의 불만과 오해를 사고, 또 포로의 석방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깨지고 말았다.


이후 온갖 고초 끝에 의사는 몇몇 부대원들과 함께 본거지로 돌아가 의병부대의 재조직을 모색하였다.

의사는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동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대동학교의 학감, 한인민회의 고문

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사는 1909년 1월 의병 재기를 꾀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의사는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등박문이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등이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의사는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등을 잡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것이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는데, 사장인 유진율은 자금과 권총 3정을 내주었고, 대동
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의사와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의사는 이등을

잡을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을 출발하여 할빈으로 향하였다.


이후 의사 일행은 유동하, 조도선등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키고 만주 철도의 도착지인 할빈과 채가구
(蔡家溝) 두 곳에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열차가 멈추는 전략적 요지인 채가구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할빈에서는 자신이 거사를 맡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맡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등이

할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의사는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할빈으로 돌아와 이등을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등을 잡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묵는 역 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의사는 10월 26일 새벽 할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 구내 찻집에서 이등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등이 탄 특별열차가 할빈역에 도착하였다. 이등은 환영 나온 러시아
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을 갖고, 9시 30분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 구내
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뒤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러우닝 권총으로 이등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등은 쓰러졌다. 이 총격으로 이등을 수행하던 비서관과 할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의사는 러시아말
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쳤다.


이후 의사는 할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의사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라 불만을 털어놓을 정도
로 일본인들 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응칠역사]
는 의사의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었다. 재판이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거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구구하게 이유를 밝혀 목숨을 구걸
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싫었다. 그래서 의사는 공소를 포기한 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여 후세에 거사의

진정한 이유를 남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시작
하면서 이것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
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에 따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강명길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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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멋진인생님의 댓글

멋진인생 작성일

대한미국이 선진국이었었으면 보수든 진보든 악질지도자들에 협력한자는 싹다 처형하고 그랬을텐데....! 이라이자와 니일스러운 인간들이 오히려 처벌당하지않는 가증스러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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