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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영전에 삼가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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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길남 작성일13-08-16 05:49 조회1,5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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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필자가 7년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자료


조사

고 안용구선생님의 영전에 삼가 올립니다

윤길상 목사님께서 보내준 부고관련 소식을 이멜을 통해 읽고 잠시 멍했습니다. 나는 콜럼비아 사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뜻밖에 김정현 사모님께서는 “안선생 너무나 조국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조국통일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입니다”라고 차분히 말씀하시고 나서 “그 분은 너무 편안하게 행복하게 가셨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모님은 “지금 즐겨하지도 않는 술을 들고 있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 이별을 참을 수 없어 약주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정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내외 통일운동 진영의 사람들이 많지만 이들 부부처럼 다정다감한 부부도 드물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7년전인 2006년 안용구 선생님 부부를 취재하러 콜럼비아 자택에 방문하여 하루를 묵으면서 안생님의 걸어 온 길을 들을 수 있었고, 부부가 만나게 된 계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분은 유명한 음악가, 또 한분은 유명한 방송아나운서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엇보다 안용구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멍했지만 우리민족의 손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인을 만나러 갔을 때 그의 2004년 발행한 저서 ‘한마리 새가되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민족통신을 위해서도 여러차례 성금을 해 주신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내 평생에 책을 읽다가 눈시울을 적신적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7년전 선물로 받은 그의 저서  『한 마리 새가 되어』라는 그분의 생애를 읽으며 여러 차례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이 책은 한길 아트에서 2004년 9월에 펴낸 고인의 자서전으로  바이올린 연주가 안용구 선생의 77년 음악일기장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 실력에 얽힌 이야기들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유명 음악인들을 배출한 뒷 이야기들도 담고 있었고, 우리나라 음악세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의 봉건적 사회상과 분단시대의 처절한 사회상을 감동적으로 반영하여 준 내용들이기에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낙천적인 음악예술가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서도  "나에게 부과된 고통이 바로 하나의 축복이었다. 과연 그 고통 없이 나의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까? 배고팠던 시절이 오히려 아름답게 회고되어 그렇게 그리울 수 없다. 황혼의 나는 이제 다시 그 옛날의 기쁨과 슬픔을 맛볼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한 대목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안 용구 선생님의 삶은 그 자체가 우리 민족사의 깨끗한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의 철학은 예속이 아니라 자주이고, 식민지가 아니라 독립이며, 불의가 아니라 정의이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이며, 분단이 아니라 통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이 이렇게 조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자라면서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것은 이모였습니다. 그는 나와의 대화가운데  "나의 이모님은 항일운동을 했다. 이모와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함흥에서 당나귀를 타고 이화학당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까지 왔다고 한다. 성격이 강직했는데 이모가 언제나 혁명투사였기에 만나면 유관순 열사 등과 항일운동을 한 활약상을 들려 주었다."고 귀띔해 준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인과의 만남에서 성장과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7년전 대화에서 피보디 음악대학에서 35년의 교수생활을 퇴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1928년 원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은 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 바이올린을 잡게 된 과정에서부터 유럽유학 기간과 그 이후 서울대 음대 교수를 거쳐 1968년 미국 피보디 음악대학의 초청을 받기까지 지나온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 4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남북 해외 음악인들의 만남을 통해 남북 가곡들을 모아 연주회를 갖기도 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조국통일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귀중한 역사의 교훈을 가슴 속에 아로 새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인의  애국정신은 어릴때 이모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분단시대,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에는 그 철권통치가 무척 싫었다는 고백들이 자서전에 배경으로 깔려있습니다. 미국으로 오게 된 중요 이유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암흑시대 때문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민오시기 전에도 한국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세계적 음악가로 길러냈지만 반세기의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후진들을 길러냈습니다.  1989년 4월10일 뉴욕에서 "분단을 넘어선 우리 가곡의 밤"을 열었고 그후 미국 전역을 돌면서 연주회도 가진바 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마지막에는 언제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울곤하였다."는 대목도 그의 저서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위대한 통일음악가를 잃었다는 슬픔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선생님의 소원이며 염원이었던 조국의 자주적통일이 이뤄지지 못한 현실을 못내 안타가와하면서 선생님께서 이루지 못하고 가신 그 소원을 살아있는 우릳르 모두가 힘을 합쳐 반드시 선생님의 염원을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 그 소원은 저희들에게 맡겨 두시고 이제 편히 편히 잠드시기를 기도합니다. 

2013년 8월17일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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